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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철학이야

문장 1

by 현진현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 가케무샤(影武者), 구로자와 아키라


이 문장에 반했던 적이 있었어. 지금도 좋고. 처음에는 '무거운 사람은 함부로 요동치지 않는다.' 정도로 이해했지. 이 대사를 들은 날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한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는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를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대로 이해해. 그러면서 '산은 알아챌 수 없이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로도 이해하지. 아빠는 문장을 무슨 '화두'로 여기나 봐. 그만큼 '문장(文章)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경향이 있어.


나는 그 사람이 아파요.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이 문장은 사랑을 고백하는 거야. '사랑해'라고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아프다고 이야기해. 예전 사극 드라마에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대사가 있었어. 바르트의 변주 아닐까?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슬퍼하는 것이다. 우울의 '순간'에 나는 매번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슬픔을 실현하고 있다'라고.

-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슬픔에 대한 바르트의 문장을 봐. 몇 개의 문장으로 '자신의 슬픔'에 대해 기꺼이 표현해내고 있어.


Old is new.

- 산토리올드 위스키


이 문장은 광고 카피야. '사랑은 먼 옛날의 불꽃이 아니다'라는 카피도 함께 사용되었어. 두 문장 모두 좋지? 나이가 많다고 해서 새롭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냐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문장은 비교적 짧지만 풍부해. 풍부해질 때는 앞 뒤 문장의 맥락들이 도와줘. 또 문장의 저층에는 콘텍스트가 있지.


모든 것은 변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 에르메스


이 문장은 철학적이지? 깊이가 있는 문장이야. 모든 것이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이야기.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지. 세상이 다 변해도 아빠가 너희들을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아.


세상은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디자인 말고는 남는 게 딱 하나 있긴 있어. 문장이야. 아빠는, 문장이란 글자만 봐도 가슴이 뛴다. 어휘들이 모이고 문장이 되고, 문장이 쌓여 책이 된단 말이야. 문장은 의미론에서 보면 독립적이야. 그것 자체로 어휘가 되고 글이 되고 책이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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