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성독서왕 수상을 위해 써본 글, 허나 수상 실패 기념으로 업로드
작가의 상상을 더해 만들어낸 어떤 허구는 진실의 모양에 더욱 가깝게 닿아있다. 김초엽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은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구’를 구성하는 진실의 한 조각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언제나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보이지 않던 것을 뚜렷하게 그려낸다. 작가가 그린 미래의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은 것일지 그 시선을 좇아가 보려 한다.
2055년 가을, 미국 샌디에이고에 있는 솔라리타 연구소에서 제어할 수 없는 스마트파티클 누출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퍼진 먼지 ‘더스트’는 자가 증식하는 성질이 있어 급격하게 늘어나 대기층을 잠식했다. 사람들은 잔인한 방법일지라도 살아남기를 선택하고, 더스트로부터 보호된 돔 시티에 들어가기 위해 애쓴다. 이때 수많은 학살이 일어나고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 차게 된다.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P.63
사람들은 이기적인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지만,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스트 시대를 지나왔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본능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답을 말레이시아의 깊은 숲 안에 있는 프림 빌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프림 빌리지의 중심에는 로봇을 수리하는 지수와 식물을 연구하는 사이보그 레이첼이 있다. 이 둘은 서로 필요에 의해 공생하는 관계에서 시작한다. 레이첼은 신체를 교체하는 작업이 필요하고, 지수는 생존을 위한 기반이 필요하다. 온실이 있는 장소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고, 레이첼이 만들어내는 더스트 독성 분해제와 여러 식용 식물 씨앗들이 공동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세상의 폭력과 더스트 폭풍에 완전한 도피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안팎의 위험으로 인해 프림 빌리지는 사라지지만, 그곳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모스바나 씨앗이 있었다.
모스바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지수와 레이첼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공생 관계에서 출발한 그들은 서로에게 호기심과 낯선 끌림을 느끼게 된다.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지수는 순수하게 식물 자체에 몰두하는 레이첼을 설득하여 더스트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유전변형을 거친 식물 ‘모스바나’를 만들어내게끔 한다. 이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모스바나’는 더스트를 종식시키는 중요한 기술적 요인이었다. 세상을 살린 기술이 나오게 된 것은 이기적으로 살아남으려는 본능에 있지 않았다. 레이첼이 지수를 향하는 따듯한 마음, 지수가 세상을 걱정하는 이타적인 마음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이런 작은 마음에서도 세상은 바뀔 수 있다고, 작가는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서로를 향하는 이타적임이라고.
프림 빌리지로부터 모스바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더스트 이후의 세상을 만들어냈다. 더스트가 종식된 뒤에는 모스바나는 지구 환경에 모습을 바꿔 지구에 공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해간다. 우리는 작가가 상상한 ‘모스바나’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식물이 거쳐 온 35억 년의 역사에서 ‘모스바나’를 대체할 수 있는 수만 가지 식물의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식물들은 변해가는 세상에 분투하면서 적응해가고 있다. 기후의 변동 폭에 따라 열매의 크기를 줄이기도 하고, 더워지는 날씨에 빨리 꽃을 피우고 사라지기도 한다. 앞으로 이상 기후가 장기간 발현된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종류의 식물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식물학자에 의해 인류를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식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식물의 가능성은 무한하고, 이 생명력은 지구가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책 속의 이야기는 여러 방향으로 교차된다. 더스트 시대를 살아갔던 지수와 레이첼 그리고 자매인 아마라와 나오미를 비롯한 여러 인물이 얽히고, 또 다른 한 축으로는 강원도에 ‘해월’이라는 지역의 유해 잡초 증식을 계기로 식물학자인 아영과 과거의 지수, 현재의 아마라와 나오미, 그리고 레이첼이 이어진다. 마치 과거의 거대한 사건이 하나의 흐름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길을 내고 뻗어가는 것처럼, 더스트로 이어진 세계도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더스트에서 길을 찾아낸 인류처럼, 우리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만들어낸다면, 그 세계의 핵심은 어떤 모습일까?
“마음도 감정도 물질적인 것이고, 시간의 물줄기를 맞다 보면 그 표면이 점차 깎여나가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어떤 핵심이 남잖아요. 그렇게 남은 건 정말로 당신이 가졌던 마음이라고요. 시간조차 그 마음을 지우지 못한 거예요.” -P.379
책을 읽는 동안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사진이 머릿속에 오래 머물렀다. ‘창백한 푸른 점’은 1990년 보이저 1호가 61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인데, 칼 세이건은 그의 저서에서 이 사진이 지금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터전인 지구를 보존하고 소중히 가꿀 책임을 말하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77억 명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 우리 각자는 고유의 염색체를 가진 하나뿐인 사람인 동시에, 77억 분의 1일의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 우주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는 하찮고도 하찮은 존재지만, 평생을 살아가는 인생의 무게는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것만큼 무겁고 끝나지 않을 지독한 시간을 관통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순간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상상하지 못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사랑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잔혹한 세상에서도 누군가는 반드시 용기와 의지로 나아간다. 『지구 끝의 온실』은 결국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가는 힘이 되는 온기 그리고 그것과 떼어낼 수 없게 이어진 용기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현재 지구상에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생물 종은 1,300만 종으로 매일 70종씩 사라져 2050년까지 생물 종의 25%가 멸종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더불어 백 년 단위로 오는 폭우나 폭염이 몇십 년 주기로 오면서,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들이 발생하고 식량 및 경제 위기로 인한 전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우리는 가상의 ‘더스트’만큼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생존이라는 단어가 두려워지는 순간이 있다. 남을 해하는 방식일지라도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변명과 진실을 감추는 침묵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해진다. 사람들은 흔히 ‘적자생존’이라는 단어에 경쟁과 독식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동식물들이 생존을 위한 과정에서 ‘공생’이 필수요소였다는 것을 학습한다면, 우리의 ‘적자생존’도 전혀 다른 과정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우리의 생존을 공생과 협력의 시선에서 다시 볼 수 있는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오랜 시간 모습을 감추고 숨어있어도, 이내 때가 되면 싹을 틔우는 식물들처럼 지구의 사람들이 각자의 온실 안에서 키워낸 희망들이 만나고 이어지길 간절히 상상해본다. 아직, 이 세계에는 사랑하고 지켜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