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갈 때면 늘 구석자리에 앉는 버릇이 있다. 볕을 바라보길 좋아하지만, 볕에 서 있는 건 즐기지 않는다. 바다에 가면, 밤에는 오징어잡이 배가 검은 바다에 떠있는 모습을 구경하길 좋아한다. 낮의 바다, 파도 위를 부유하며 서핑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면 마음이 안정된다. 서핑하는 사람들은 내리쬐는 햇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다도 두렵지 않아 보인다. 내가 가질 수 없는 대범함은, 늘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어릴 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자리는 4분단 맨 뒤, 창가 자리였다. 햇볕을 커튼으로 반쯤 가리면 빛이 책상의 일부를 차지하곤 했다. 그럼 그 책상에 깃든 따듯함을 이불 삼아 낮잠을 자기도 했지. 빛은 나의 일부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늘 그런 삶의 선택에선 빗겨있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고. 그래도 내가 나만 알아주면 된다고 여기던 지난 시절. 지금의 시절.
엄마는 친구도 많고, 말을 잃어 얼버무리는 일이 없다. 혼자 언니와 나를 키우면서 못 마시던 술이 엄마를 구성하는 수식어의 일부가 되었다. 엄마는 지금도 술을 마시면 온몸이 빨개진다. 그럼에도 술을 좋아한다. 기분 좋아도 술을 마시고, 슬픈 날에도 술을 마시고, 그럭저럭 지나온 날에도 술을 마신다. 엄마는 구석진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1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이사 온 첫날, 엄마가 실크 잠옷을 입고 빨개진 얼굴로 잠에 들었다. 엄마는 구석진 자리를 싫어하지만, 거하게 취한 순간엔 곧바로 웅크려 잠에 든다. 나는 그 태아 같은 모습을 상상하며, 조용히 이불을 덮어준다. 엄마는 구석진 나의 모습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나를 햇볕이 맹렬히 내리쬐는 곳으로 나를 강제로 데리고 간 적은 없었다. 엄마는 술을 잘 마시지만, 언제나 빨개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지금은 연락이 뜸한 한 친구가, 어느 날 말했다. “너는 언젠가 고립되고 말 거야” 친구는 내가 믿는 신념이 나를 망칠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굳게 믿는 마음’ 신념. 그건 사실 내 정체성인데. 언젠가 믿지 못하게 될, 일회성의 마음은 아닌데.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었는데.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에게 설명하려 애쓰지 않을 거라 다짐한 날이었다.
지금 내 주위에 남은 친구들은 비슷한 종류의 친구들뿐이다. 나를 무시하거나 내 생각을 강요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런 게 고립이라면, 나는 영원히 이 안온한 울타리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떠들고, 먹고, 마시고, 하루를 살아내고 싶다. 그들 덕분에 난, 오늘도 구석진 자리에 있을 수 있다. 볕을 좋아하지만 볕에 서 있기는 싫어하는 나에게 차양을 만들어 준 손은 내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