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있는 커다란 창문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맞은편 아파트와 그 옆에 또 아파트가 보인다. 주민들이 테라스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고, 먼지가 쌓인 창문을 덜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고, 방에 난 작은 창문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을 자주 마주친다. 그리고 그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엔, 서로의 영역을 지키는 작은 틈이 있다.
그 틈은 매일 색깔을 달리한다. 비가 오는 날엔 회색빛으로, 쨍쨍한 햇볕이 내리는 날엔 하늘색 바탕에 하얀 뭉게구름으로 물들여져 있다. 집에만 있는 날엔 그 작은 틈 하나가, 숨통이 되곤 했다. 주민들이 화분에 물을 주고, 자신의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보다 나의 눈길을 끈 건 그 작은 틈이었다.
세상에 무수한 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형형색깔로 이뤄져 있는 틈은 많은 사람들의 갈구의 대상이 된다. 그 틈엔 주저나 망설임 같은 건 없다. 그곳에서 다른 색깔의 난, 외로워지고 만다. 어떤 틈은 흑백으로만 이뤄져 있어서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대사도, 색깔도 없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이 가는 틈은, 정의 내릴 수 없는 ‘공백’ 그 자체였다. 무슨 색으로든 입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총집합.
한때 내가 좋아하던 소설가 김연수 작가의 단편소설 <달로 간 코미디언>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 앉아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어”
가끔 노래를 들으면서 거리를 걸으면, 이번 노래와 다음 노래 사이, 그 사이의 공백마다 들리는 내 발자국 소리, 스치는 타인의 기침소리, 버스가 지나가며 시동이 걸리는 소리, 놀이터를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산책 나온 강아지가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짖는 소리. 그런 소리들이 귓가에 확하고 들어찰 때가 있다. 그럼 나는 나만의 세계에 머물다가,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사이 타인의 세계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다. 하지만 그다음 노래가 재생되면 나아간 걸음은 그대로 정체된 채 어디론가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저 꼼짝없이 서 있게 된다. 그런 나를 내가 지나친다. 공백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공백을 알게 된 이후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어색한 침묵을 깨려 애쓰지 않는다. 그 공백을 견디는 친구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 그 침묵을 견디는 연인의 마른 기침소리, 그 틈을 견디는 엄마가 밥그릇과 수저를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 소리들이 나는 좋다.
그 공백도 나와 그의 대화의 일부가 되었으면 바라게 됐다. 공백을 메꾸려 애쓸수록 어떤 사이는 자꾸만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공백은 그 자체로 하나의 틈이고, 거기에는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무수한 대화와 추억의 가능성이 집합해있으니까. 그 가능성으로 우린 사랑을 하고, 서로의 온기에 빚진 시간을 덜 외롭게 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