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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대여 자신감下

by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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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꼭 대단한 용기 없이 집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해도 좋은 날이었다. 한가한 저녁 아래, 벼락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베트남에 있는 아빠가 위급하게 한국으로 이송된다는 소식이었다. 낯선 단어의 나열이었다. ‘위급’, ‘이송’, 그리고 ‘아빠’라는 단어에 가슴이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척 오빠에게 소식을 전한 뒤 다음 날, 아빠가 있다는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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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하기 위해 호적에 있는 ‘가족’ 중 한 사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언니는 브라질에 있었고, 아빠와 이혼한 지 오래된 엄마는 가야 할 의무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2시간에 걸쳐 서울 송파구에 있는 아산병원에 도착했다. 깊게 심호흡한 뒤 응급실로 발을 내디뎠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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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앞에 도착하자 큰아빠와 큰고모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10여 년 만이었다. 부러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자 큰고모가 말했다. “아이고, 오랜만이다. 잘 컸네. 잘 컸어.” 왜인지 알 수 없지만 내심 뿌듯해 보이던 큰고모는 금방 표정을 바꿨다. 엄마와 아빠를 동시에 비난하며 왜 떨어져 살아서 고생이냐고 질타했다. 나는 허허 웃고는 엄마 아빠의 선택을 존중하며, 엄마의 대변인이 된 것처럼 엄마는 행복하다고 강조했다.


입꼬리가 마구 떨려오기 시작했다. 큰고모와 대화가 끝나면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관문이 남아있었다. 응급실에 아빠를 보러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준비조차 하지 못했는데, 곧 나를 부르는 소리에 안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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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워 있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인영은 나에게 별다른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반길 기력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당연히 다정한 부녀의 대화 같은 것도 없었다. 제삼자인 병원 관계자의 목소리만이 응급실을 울렸다. 아빠가 어떤 상황인지 설명했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온갖 어려운 의료 용어가 내 귀에서 튕겨 나갔다. 곧 설명이 끝나고 관계자는 개운하면서도 안도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작은 따님이라도 오셔서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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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상한 말이었다. 지난 13년 동안 난 ‘엄마’의 딸로만 살아왔을 뿐인데. 그 시간 동안 아빠와 내가 주고받았던 건 고작 사진 하나가 담긴 메일 한 통뿐이었는데. 무엇이 ‘다행’이란 말인가. 아빠에 대한 걱정보다, 지난 시간 내가 누리지 못했던 실체 모를 무언가가 마구 몰아쳐 나를 괴롭혔다. 피로 이어진 사이는 무엇일까. 도대체 뭐길래 추억 하나 온전치 않은 이 아저씨를 여전히 ‘아빠’라 부르며 통증하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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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내가 필요했던 건, 떨지 않고 무언가를 잘 해낼 자신감만은 아니었다. 울지 않고, 마음 아프지 않고 무난히 그 순간을 걸어 나올 자신감이었다. 상처받지 않을 자신감이었다. 그날의 난, 무사히 병원을 빠져나왔지만 어떤 마음으로 병원을 걸어 나왔는지 상처 한 톨 받지 않은 건 맞는지 아무리 떠올려 봐도 떠올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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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만 느껴지던 이 기억도 이제는 10년이 다 되어 간다. 아빠와 연락이 끊긴 지 23년이 넘어간다는 뜻이다. 그 사이 나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는 새로운 정의를 맞이했다. 꼭 피로 이어지지 않아도 우린 가족이 될 수 있다. 낭비되는 플라스틱이 아까워 매일, 어딜가든 손에 텀블러를 꾹 쥐고 다니는 근사한 우리 형부가 그러하고, 마음 가까운 곳에서 용기를 건네는 나의 친구들, 선배들, 동료들이 그러하다.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건, 제삼자가 전하는 간접적인 소식이 아닌 서로가 묻고 답하는 안부와 끼니 걱정과 근황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무난히 이어지는 하루와 하루들뿐이다. 이들 앞에서 나는 강해진다. 비트가 센 노래를 듣지 않아도 단단한 걸음으로 땅 위를 딛고 설 수 있게 된다. 자신감은 애쓰지 않아도 마음 안에서 자란다. 이들 앞에서야, 여린 나의 자신감은 마침내 영구적인 대여를 마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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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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