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31일. 난 강원도의 한 스키장에 있었다. 친척들과 모여 앉아 뒤통수가 튀어나온 브라운관 TV를 들여다봤다. 2000년 1월 1일을 5분 앞둔 시각이었다.
들뜬 가족들 사이로, 10살의 내가 침을 꼴깍 삼킨다. 어쩐지 긴장이 된다. 머릿속엔 티브이에서 떠들어대던 어른들의 말이 떠다닌다.
“서기 2000년이 되면 컴퓨터가 연도를 인식하지 못해서 엉뚱하게 작동하는 문제, 이것을 밀레니엄 버그 또는 Y2K라고 하죠. 이것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2000년을 코앞에 둔 지금, 지구 종말설이 현실로 이뤄질 지...”
새천년을 맞이한 순간, 지구가 종말 될 거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밀레니엄 버그로 인해 발생할 혼란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상식량을 사느라 붐비는 마트 풍경을 보며 어린 다다는 겁을 먹었다. 어떡해. 너무 무서워. 학교 다니는 게 막 재밌는 것도, 그렇다고 사는 게 즐거운 것도 아닌 나였지만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건 싫었나 보다.
하지만 소심을 넘어 초소소심쟁이였던 난 혼자만 끙끙 앓으며 1999년 12월 31일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겸허히 종말이라는 것을 맞이해야겠다는 비장함이, 꼭 쥔 작은 두 주먹에 담겨 있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10… 9… 8… 7…
심장 소리에 가속도가 붙는다. 두근두근.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본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무는 그 순간에도,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다.
4… 3… 2… 1
종말이다. 곧 모두가 사라지고 말 거야! 두려움에 꾸욱. 눈을 감는 순간 귓속으로 묵직하면서도 청명한 제야의 종소리가 들린다. 딩- 딩- 딩-. 감았던 눈을 뜬다. 좋아하는 친척들의 모습이 보인다. 모든 게 그대로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안도됐지만 내심, 시시해졌다.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구종말론이, 내심 무언가 바뀔 거라 생각했던 시대가 도래했지만 나는 여전히 나였다. 툭하면 울어버리는 나, 소심해서 하고 싶은 말은 꾹 참아내는 나, 친구랑 친해지는 데 정성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나, 낯선 이들 앞에선 한 톨의 밥도 잘 넘기지 못하는 나. 내가 여전히 나라는 게 너무 시시하고 재미없어서, 들뜬 표정의 어른들 사이를 지나, 방에 들어가 잠에 들었다. 그렇게 10살의 다다는 11살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건너오게 됐다.
하지만 다행인 건, 좋아하는 가요들도 함께 21세기로 건너왔다는 것이었다. 이 노래들을 새천년에도 들을 수 있다! 변하지 않는 일상 중 나를 기쁘게 한 것은 그것이었다. 라디오에 카세트테이프를 넣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녹음해 듣는 일. 좋아하는 가수의 테이프를 사러 음반 매장에 가는 일. TV 앞에 앉아 음악방송 프로를 보는 일. 주주클럽, H.O.T., 핑클, 자우림, 쿨, 룰라, 영턱스클럽, 박지윤, 유피. 등등. 팝송은 듣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언제나 내 옆엔 1990년대 가요가 있었다.
어느 여름날의 고속도로가 활자를 비집고 끼어든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아빠까지 온 가족이 다 함께 여행을 가던 때였다. 오른쪽에 바다를 끼고 도로 위를 질주하던 봉고차엔, 누군가 테이프를 넣어 재생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꿍따리 샤바라 빠빠빠-’
그다음 구절이 나도 모르게 따라 나왔다. ‘빠빠 빠빠빠 빠빠빠’ 노래를 부르며 열어둔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기다란 봉고차가, 시간의 바깥을 향해 떠나는 기차인 것만 같았다. 이대로 종말하고 싶다. 어떤 행복한 순간은 너무 행복해서 슬퍼지기도 한다는 걸,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렇게 어린 시절 나의 순간 곳곳에 존재하던 가요들로, 가끔은 여름에도 느껴지던 한기를 달랬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에 와서 그 시절 음악을 들으면 신이 나 몸을 들썩거리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슬퍼지고 마는 것이다. 곧게 걷다가도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 두고 온 게 있는 사람처럼.
정체 모를 미련에 청승을 떨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에블린이 되어보기로 한다. 다른 평행 세계 속 10살이 된 다다.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해, 스피커가 아주 커다란 카세트를 수소문하고 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어렵게 구한 카세트를 올려놓곤, 가장 좋아하는 가요 테이프를 밀어 넣는다. 그러고는 네모난 플레이 버튼을 힘차게 누르겠지. 뮤직은 쿨의 <슬퍼지려 하기 전에>. 온 세상에 울려 퍼지듯 크게 노래가 흘러나오면, 평행 세계 속 다다는 옆에 선 친구들을 부둥켜안고 막춤을 춘다. 그 어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