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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동의어, 이소라

by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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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겨울은 ‘이소라’와 동의어다. 롱패딩으로도 바람을 막기 어려워질 때면, 서러운 마음 틈에 찬 기운이 들어찰 때면 이소라의 노래로 몸과 마음을 데우곤 한다.


그의 노래는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사랑에 막연한 행복을 머금는 대신, “사랑은 비극 (<바람이 분다>)”이라 말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끝도 없는 사랑을 보여주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다는 결심을 내비친다. 사랑에 있어서, 괴롭고 힘들어할지언정 도망치지 않는다. 직시하고 끝까지 아파한다. 그렇게 얼어붙은 마음이 바닥에 눌어붙어 녹아내릴 때까지 견디다, 또다시 사랑할 용기를 길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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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그가 새 앨범을 발표했다. ‘이소라 7집’이다. 그리고 수록곡 모두 제목을 짓지 않았다. 대신 트랙에 번호를 차례로 붙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듣는 사람들에게 ‘나만의 노래’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고.


그렇게 그 앨범은, 내 귓가에 흘러든 순간 ‘나만의 노래’로 재해석 됐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이렇게 태어났고 태어난지도 모르게 그렇게 잊혀지겠지 (<Track 9>)”라는, 비관의 심정으로 하루를 보내다가도, 또 동시에,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우리가 가야 하는 곳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love is always part of me (<Track 3>)”라 여기며 씩씩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사랑의 고통과 삶의 고통, 그리고 사랑의 기쁨과 삶의 기쁨을 동시에 말하는 사람. 어느 하나 배제하지 않고 견디는 그의 태도를 닮고 싶어진다. 맘껏 아파하고 후회 없이 살아간 뒤 참으로 슬프고 행복했노라, 털어놓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결국 또 도망치길 택했던, 어느 해 12월. 그의 목소리로 손쉬운 위안을 얻고 싶어 콘서트 티켓을 끊었다. 운 좋게 1열을 잡아 관찰하듯 그의 공연을 지켜볼 수 있었다. 매번 그의 옆에 놓여있는 가습기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자, 지지부진한 사랑의 시름이 잊힌다. 하얀 연기에 그의 얼굴이 가물거리는 것도 좋고, 꺼진 마이크를 비켜나 들리던 허밍 소리와 인이어를 만지작거리는 세심한 손짓도 좋았다. 한쪽 팔에 무게를 싣고 부르던 그날의 노래들이, 이미 시작되어 버린 겨울과 끝나버릴 사랑을 실감하게 했다.


유명한 어느 노래 가사처럼 사랑은 늘 도망가는 걸까. 아니면 내가 도망치는 걸까. 그런 감정에 흠뻑 빠져있던 중 그가 <바람이 분다>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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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그 노래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감상하는데, 순간 고정된 시야 사이로 거슬리는 손짓이 들어찬다.


옆자리 앉은 남자 관객이 지상 최고의 발라드 <바람이 분다>에 맞춰, 무려 손 박자를 치기 시작한 거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클라이맥스다. 이소라의 휘몰아치는 고갯짓에 따라 남자의 손이 더 세차게 리듬을 탄다. 타인의 손짓은 무시한 채 목소리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그의 움직임이 더 빨라진다. 이 사람, 나랑 같은 노랠 듣는 게 맞나? 의심이 갈 정도로 격한 손짓. 두두둥 탁탁. 귀를 기울이면 들릴 듯한 박자 소리에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쏙 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노래가 끝이 났다. 남자는 결국 <바람이 분다>가 끝날 때까지 혼자 흥에 겨워 손 박자를 탔다. 혹여나, 나의 소곤거림이 공연을 망칠까, 몰래 남자를 째려보기만 한 게 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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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화가 났는데, 지나고 보니 웃게 되는 해프닝이 됐다. 눈물과 화가 공존하던 그해의 공연을, 2024년의 끝자락 다시 꺼내보며 웃음 짓는다. 올해는 그의 공연이 없어서 아쉬우니, 그렇게라도 한 해 치 위안을 얻는 것이다. 헛헛한 마음에 이소라 공연 영상을 찾아보고 노래를 듣던 중, 한 인터뷰를 발견했다. 서른일곱의 이소라는 사랑은 곧 이별이라 정의한다. 기자가 묻는다.


“그런데 사랑이 곧 이별이라고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요?”


그가 답한다.


“아니요, 사실 오늘 죽잖아요. 내일 죽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 내 임종의 순간은 오늘이란 말이에요. 제가 서른일곱이지만, 지금을 살고 있지만, 결국엔 나 죽는 날도 분명히 오늘일 거야, 지금, 이 순간. 그럼 너무 빠른 거야. 사랑이고 이별이고 그런 거. 한낱 이별 나부랭이.”


지난겨울을 그리워하던 나는 머쓱해진다. ‘지금, 이 순간’의 순간들을 소홀히 한 까닭이다. 그래 오늘은 2024년의 크리스마스니, 캐럴부터 찾아 들어야겠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도 건네야겠다. 선물 꾸러미를 열던 어린 시절의 들뜬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도 좋겠다. 맘껏 아파하고 기뻐하고, 또 후회 없이 살아간 뒤 참으로 슬프고 행복했노라, 털어놓고 싶어지는 순간은 ‘오늘’도 마찬가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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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오늘의 크리스마스 송은, 이소라의 <겨울, 이별>. 이 겨울과도 그리고 2024년의 마지막과도 잘 어울리는 노래다. 사랑에게 보내는 가사가, 올해에게 보내는 가사 같다. “겨울 눈이 투명하게 춤추네/너무 평화로운 오후/초라한 얼굴로 나는 기다리고 있네/너는 얼은 발걸음을 멈추네/살을 파고드는 바람/차가운 소리로 난 시린 손을 흔들며 인사해/안녕 떠난다며”


안녕, 떠난다는 2024년에게 시린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본다. 그런 뒤 이제 우린, 곧 펼쳐질 새해의 기쁨과 설움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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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다다 (인스타그램 @ddidawn)

⊙ 그림 : 서콩 (인스타그램 @se0c0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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