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기로 해놓고선
고등학교 2학년 때, 문학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갑자기 넌센스 퀴즈를 내셨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한 글자"
나는 손을 들고 대답했다.
"정답은 '나'입니다!"
"내가 여러 반에 물어봤는데 처음으로 정답이 나왔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건 나 자신 아닌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질문 같은데 왜 다른 반에서는 정답이 안 나왔지?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선생님이 내가 쓴 시를 보고는 "공모전에 한 번 내봐"라고 하시길래 공모전에 작품을 내봤다. 신기하게도 공모전에 예선 통과를 해서 본선을 치르러 마로니에 공원에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문예 창작과에 진학하기 위해 준비하는 학생들이 무척이나 떨리는 마음으로 마로니에 공원에 왔을 텐데, 나는 별생각 없이 갔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당연히 본선에서 탈락했다.
그때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공모전에 시를 출품한 것일까? 수상을 하면 문예창작과에 진학할 생각이었나? 상을 받았어도 문예창작과 진학을 희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글재주가 있다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뿐,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때의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 꿈이어서 취업이 잘 되는 과로 진학하고 싶어 했다. 아니면 내가 정말로 배우고 싶었던 일본어나 심리학을 전공하고 복수전공으로 경영학을 하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나라고 바로 답할 수 있을 정도로 내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내 마음은 내가 잘 알지'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늘 내 마음으로부터 뒤통수를 맞는다. 내 마음은 수시로 바뀌니까. 30대가 되자 내 마음은 '호르몬'과 '날씨' 그리고 나의 '신체 상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나는 내 마음에 속지 않는다.
어젯밤엔 분명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도망치고 싶고 도시락 싸는 것도 귀찮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아침 도시락을 쌌고, 자동반사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막상 시작하니 별 일 아니다. 이럴 땐 습관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어젯밤엔 분명히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는데. 가끔은 내 마음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가를 미리 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젯밤에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도망치고 싶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든 건 신체적으로 피곤해서 그랬을 것이다. 요즘 일교차가 심하니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날씨에 적응하기 어려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 요즘은 갑자기 부정적인 마음이 찾아오면 건강 앱으로 여성 호르몬의 영향인가 확인부터 한다. 환경적인 요인이 아닐 때는 지금 내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어려워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듣거나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됐다.
창업을 해서 청년들에게 '이렇게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결심한 것은 분명 나인데, 나는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앞으로 어디로 가면 좋을까?라는 것에 대한 답도 못 찾겠고. 나는 정말 1인 기업 대표가 맞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다 우연히 이슬아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에서 '초심'에 관한 내용을 접했다. 외국에는 초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없다고 한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 사람 마음은 날씨처럼 늘 변하는 것이 정상인데, 나는 나 자신에게 항상성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바뀌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여기니 도리어 내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게 쉽더라. 이렇게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있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잊은 건 괴로웠던 기억에서 벗어났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20대에는 취업 준비생으로 지내며 아무도 나를 바라봐 주지 않는 현실이 참 원망스러웠는데, 내 이름으로 책도 내고 내 능력을 인정받으며 어느 정도 수익도 생기니 고생했던 시절을 잊어버리게 된 걸 거다. 여기에 맛있는 음식 먹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20대에는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서 안달이 났었는지. 나이와 무관하게 인정을 받은 경험이 한 번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고.
앞으로 어디로 가면 좋을지,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내가 세운 계획이 전부 뒤집어졌는데 당장 먹고살 길을 찾기 바쁘다 보니 새로이 계획을 세울 여유가 없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 이후로 오히려 계획을 세우는 게 손해로 느껴질 때도 있어서 그럴지도. 코로나19가 참 많은 것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말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평소 습관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미래에 어떤 변수가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의 계획 세우기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크고 장기적인 목표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계획을 세우는 게 적절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지만, 하루를 허투루 보내면 분명 후회하는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이라는 건 잘 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조금씩 해나가는 것으로 회복을 해야겠다. 분명 코로나19로 인해 생긴 여러 변화로 마음이 다쳤는데,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하느라 잠시 내버려 두었더니 그 녀석이 종종 '나도 치유할 시간을 줘!'라고 외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알려면 역시 질문을 잘해야 한다. 마음이 일관성 없는 말을 계속하면 그땐 몸을 움직이는 게 답이고. 내 마음 알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며 공존하고 살아가는지, 역설적으로 참 신기하다. 그래도 어찌어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내 자신에게 약간의 점수는 주려고 한다. 잘하고 있다, 너답게 그냥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