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뭘 해도 재미없다는 노잼 시기다. 이 사실을 브런치처럼 오픈된 공간에 썼다가는 이직 준비를 할 때, 협업할 때 결격 사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노잼 시기인 사람이 '무책임한 행동'을 하거나 매사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근무태만이나 성과 저하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역할을 다할 때 쓰는 페르소나는 노잼 시기가 없으니까. 경쟁이 치열한 대한민국에서 성실하지 않은 사람을 그렇게 자주 본 적이 없어서 (웃음)
난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되려 더 무섭게 느껴질 때도 있다. 저러다 어느 날 전부 연소가 되어서 크게 번아웃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 사람들에게 노잼 시기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한 인지도 되고 그걸 타인에게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으니 스스로에게 솔직한 걸지도 모르겠다.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네이버에 주간 일기 챌린지를 꾸준히 해내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다. 누가 열심히 살았나 혹은 누가 재미있게 잘 놀았나 경쟁하는 기분이다. 가급적 주간 일기는 보는 사람을 위해 즐거운 일상 위주로 작성하고 있다. 고뇌는 브런치에,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인스타그램에, 즐거움에 관한 회고는 네이버 블로그에 분산시키는 느낌.
힘든 기색 없이 늘 열정이 가득하고 명랑하며 밝은 모습은 만화 주인공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속성이지 사람의 속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체를 통해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편집된 모습을 볼뿐이다. 우리네 인생도 편집하면 다 멋진 순간뿐이다. 노잼 시기라고 해도 하루에 한 가지 정도는 즐거운 일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한 가지의 일이 나의 마음을 어둡게 칠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
노잼 시기인 사람에게 열정으로 극복해야 한다, 배부른 소리다, 나약한 소리를 한다 등의 말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듯하다.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 <사랑을 주세요>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힘내라, 열심히 살아라'라고 격려하는 소리들만 넘치는 세상. 이제 사람들은 그런 말로는 참된 힘이 솟지 않아. 나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어.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중략) 굳이 힘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잖니? 인간이란 실은 그렇게 힘을 내서 살 이유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거꾸로 힘이 나지.
츠지 히토나리 <사랑을 주세요>
사랑을 주세요의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역설처럼, 뭐든 흥미가 떨어지는 노잼 시기에는 재미있는 걸 찾아보라고 말하는 것보다 '그럴 때가 있지'라고 말하는 게 결과적으로 가장 좋은 해결책일 수도 있다. 노잼 시기는 태풍처럼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 같다. 열정 부자들의 훈수 두는 말들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됐다. 나는 아직 걸을 준비도 안 됐는데 이제부터 100m 달리기 할 거니까 최고 속도로 달리라는 말처럼 들려서. 준비 운동도 안 하고 바로 뛰라고?
건강한 음식 챙겨 먹고, 문화생활도 좀 하고 (영화, 뮤지컬, 연극, 전시회 등 관람하기), 운동도 좀 하고 (걷기가 특히 도움이 되더라), 하기는 싫지만 해야 하는 일들을 꾸역꾸역 해내면 또 원래대로 돌아오더라.
나는 노잼 시기에는 어릴 때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의 OST를 찾아서 듣는다. 그럼 노잼까진 아니고 적당히 기분은 좋은 정도로 텐션을 올릴 수 있다. 잠깐 나를 속이는 것이다. 그러면 또 해야 할 일들을 어찌어찌하게 된다. 집에 가면 요즘 재미있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의 반복이긴 하지만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더라. 노잼은 변화를 원하는 내면이 보내는 신호 같기도 하다. 학창 시절 수학 공식 대신 내 감정을 정확히 인지하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실 내 마음을 몰라서 노잼이라고 대충 퉁치고 있는 거 아니겠어?
노잼 시기에는 월급 루팡이 되게 하소서!
천사소녀 네티 OST
내면과 대화를 해도 딱히 답이 나오지 않으면 일상 속 작은 도전을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자기 효능감을 느끼면 그날 하루는 만족한 하루로 보낼 수 있다. 네이버 주간 일기 챌린지 같은 걸 해보는 것도 좋고, 나만의 루틴 만들어서 매일 지키기 같은 일도 좋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이불 개기라든가 샤워하고 바로 머리카락 치워서 버리기 같은 일도 좋다.
노잼을 넘어 약간의 무기력증과 우울감을 갖고 계시다면 <우울할 땐 뇌과학>이라는 책을 읽어보시길. 꽤 괜찮은 답들이 있을 것이다. 과학적 지식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쌓는 거구나, 라는 것도 느낄 수 있다.
나는 내면의 자신이 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주말에 시간을 내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페르소나도 이고도 내려놓고 잠시 나의 그림자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그림자가 왜 힘들어하는지, 얘기 좀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