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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미래 Feb 23. 2024

웃지 말고, 나는 발레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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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을 일이 없었다. 30대에는 결혼과 일을, 출산과 육아를 하느라 웃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눈 떠보니 어느덧 40대. 점점 아이에게도 손이 덜 가고 집안일도, 회사 일도 익숙해졌다. 결혼 10년 만에 어느 정도 자동화 시스템이 자연스레 구축된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별일 없이 산다. 어쩌면 가장 평안한 상태일 테지만, 단 한 가지 크게 웃을 일이 없어졌다.  

  

  그걸 피부로 느끼게 된 건 1박으로 떠난 펜션 여행이었다. 사천의 갯벌에서 한 낮 내내 뻘만 머금은 조개를 캐고 보니 어느덧 해가 졌다. 저녁 메뉴는 고민 없이 바비큐. 별도로 지어진 바비큐 장에서 친구네 가족들과 식사를 준비했다. 비수기라 그런지 넓은 바비큐장에는 우리와 젊은 대학생들로 보이는 한 팀뿐이었다.


  뜨거운 불 앞에서 장난을 치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치고 개수대를 분주히 오고 가며 채소와 먹을거리를 다듬었다. 제법 한 상이 차려지고 자리에 앉았을 때는 절로 '아이고' 소리가 나왔다. 왜 모든 펜션의 냉장고는 제대로 작동하질 않는지. 이미 다 식어 빠진 맥주를 들이키며 아이 입에 삼겹살 한 점을 넣고 그제야 엄마들은 첫 술을 떴다.


푸하하하하!


그때 옆 테이블에서 박장대소가 터졌다.

박수도 치고 서로의 몸도 쳐대는 마구 웃는 소리였다.


엄마, 저 누나들 왜 웃어?

글쎄, 모르겠네.


가만히 보니 쌈장 대신 고추장을 챙겨 와서 웃고 있었다. 별거 아닌 일에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그 웃음을 우리 일행들은 불꽃 축제라도 감상하듯 멍하니 바라봤다.


우리도 저런 때가 있었지.


  누군가 던진 말에 40대의 엄빠들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릴 때 엄마가 우리를 보고 하던 그 말을 이제 내가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20대의 파릇한 젊음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와중에 돌연 마음 한 켠이 시들해졌다. 더는 저렇게 웃을 일이 없겠지.

그랬는데,   



  발레 학원 '센터' 수업이 시작됐다. 아, 이렇게만 써도 웃음이 난다. 나는 웃참 챌린지에 나가면 상위권이 확실할 정도로 잘 웃지 않는 편이다. 앞서 밝혔듯 빵 터지는 웃음은 20대에나 있었다. 그런데 발레가 이렇게 나를 웃기다니. 정확히 말하면 발레를 하는 내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웃겼다.


발레 수업은 매트에서 몸을 푸는 스트레칭, 바를 잡고 서서 동작을 하는 바 워크, 바를 모두 치우고 오직 몸 만으로 동작을 하는 ‘센터’ 수업으로 이어졌다. 초급반은 센터 수업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바 없이 서서 동작하는 게 어렵고 팔과 다리 동작이 아직 익숙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은 센터 수업 좀 할게요.


선생님의 말에 수강생들이 조용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얼굴에 난색을 드러내는  의아했다. 그때까지도 제대로  센터수업을 해본 적이 없었고 바 없이 동작만 잘 따라하면 되겠거니 했다.


선생님이 먼저 왈츠 스텝을 시범 보였다. 4박자에 맞춰 양다리를 플리에로 굽혔다가 발을 옆으로 옮겨가며 반복하는 동작이었다. 문제는 발 동작에 맞춰 팔도 움직여야 했는데, 오른발이 옆으로 옮겨가면 양 팔도 같은 방향으로 가줘야 했다.


쿵, 짝, 짝. 쿵! 할 때 팔과 다리를 이렇게 움직여 주세요.


선생님은 숨 쉬듯 편하고 우아하게 왈츠 스텝을 밟았다. 다리도 팔도 살짝씩 굽혔다 펴는 동작일 뿐이라 몇 번 보니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자, 저 대각선 끝에 서시고 한 분씩 해볼게요.


그 말에 수강생들은 몰이사냥이라도 당한 듯 구석에 옹송그리며 모였다. 앞을 보고 있지만 다리는 저마다 뒷 걸음질 쳤는데 치열한 눈치 싸움이 끝나자 무방비하게 서 있던 내가 첫 타자가 되었다.  

선생님의 동작을 머릿속에 복기하며 심기일전. 나는 자신 있게 뚱땅 거리는 음악에 맞춰 첫 발을 떼었다.


아, 그 의욕이 문제였던 걸까. 내 스텝은 정확했지만 태평양처럼 넓었다.


사뿐사뿐 가볍게 움직이던 선생님의 스텝과 달리 나는 여러모로 과격했다. 우아하지 않고 우우우와, 우와, 우와.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비지엠이 들리는 듯하고 목도리도마뱀 한 마리가 제멋대로 강의실을 뛰어다니는 듯했다. 음악 박자는 놓친 지 오래. 팔은 다리와 완벽하게 분리되어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거울로 짧고 강렬한 내 몰골과 함께 선생님의 표정을 마주했다.


아...... 선생님이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렇다. 나의 웃긴 몸 개그는 오직 나만이 웃을 수 있었다. 나는 발 스텝을 옮기다가 풉, 팔을 발과 반대로 휘젓다가 풉. 빵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굴러가는 낙엽만 보고도 웃음이 나던 그때로 돌아간 것도 아닌데.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어느 정도 끼어든 웃음이었지만 정말로 웃겼다.


 선생님이 급한 불을 끄듯 옆에 서서 같이 하니 대비되면서 더욱 웃겨졌다.  순서가 끝나고 이어진 수강생들의 스텝부터는 웃참 챌린지였다. 목도리도마뱀  마리,  마리,  마리, 다섯 마리......


이제 다 같이 해볼게요!


목도리도마뱀들의 군무까지. 나는 정말 속으로 눈물이 쏙 빠지게 웃었다. 그러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니, 발레가 이렇게 웃길 일이야?


바를 모두 치운 넓은 강의실 한복판은 무대와도 같은데 모두들 발레 대신 몸 개그를 시전 했다. 그 와중에 선생님의 멘트도 개그였다.


웃지 말고! 나는 발레리나다!


이제 머릿속에 뛰어다니던 목도리도마뱀들이 레오타드와 스커트를 입고 있다.


발레 스텝은 하나하나가 집중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동작이 흐트러지고 마구 웃겨졌다. 누가 알았을까. 왈츠 스텝과 목도리도마뱀의 스텝이 한 끗 차이인 것을. 뒤에 이어진 파 드 샤(pas de chat)는 더 난감했다.


파드샤 :  

‘고양이의 스텝’이라는 뜻. <백조의 호수> 제2막 중 귀여운 빠드 까트르의 등장에서 볼 수 있는 인상적인 빠(pas)로 여성 무용수의 것이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순간 무릎을 벌린 양쪽 다리가 엇갈리는 듯 내려오기 때문에 고양이가 사뿐히 뛰는 인상을 준다. - [네이버 지식백과] 빠 드 샤 [pas de chat] (발레용어사전)


  파드샤는  명씩 동시에 나갔다.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뛰는 동작대신 쿵쾅 대는 착지와 제멋대로 나부끼는 팔과 다리.

저런, 이번에는 고릴라 무리가 나타났군요.

어디선가 동물의 왕국 내레이션이 들리는  같았다.

그렇게 뛰면 무릎 다 나가요!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꾸 기본을 까먹는다. 발 끝을 구부려 부드럽게 뛰고 착지도 소리도 나지 않게 사뿐해야 하건만, 동작을 신경 쓰느라 발바닥으로 온 체중을 실어 착지하는 게 문제였다.

아파트에서 해도 층간소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운동이 바로 발레다. 그 앞에는 이런 전제가 붙는다. 발레리나만큼 제대로 할 수 있을 때.  


발레리나의 스텝은 공간을 부유한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가볍게 공중을 떠다니는 듯하고 수면 위를 걸어 다니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초급반의 우리는, 가혹한 평이겠지만 초원을 뛰어다니는 짐승들 같다.


  센터 수업이 끝나고 이상하게 후련했다. 수업 내내 배꼽을 잡고 웃었더니 잠자고 있던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던 걸까. 다른 수강생들의 얼굴에도 웃음의 여운이 가득했다. 평소 웃지 않아 팽팽하던 얼굴 근육들이 시원하게 스트레칭된  같았다. 거기다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부끄러운 모습들을 공유한 직후였다.  같이 목욕탕이라도 갔다  기분이었다.


  초급반을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웃을 일이 많아진다. 문득 선생님의 웃지 못하는 고충에 대해 생각한다. 선생님은 필시 소림권법을 연마하기 위해 나무를 손가락으로 찔러 대던 수도승처럼 허벅지를 찌르고 있지 않을까. 소림사에 있는 구멍 뚫린 나무를 떠올리며 선생님의 허벅지를 걱정해 본다.


아니면 그간 숱하게 리플레이된  개그에 어느 정도 눈이 숙달된  아닐까. 아니면 아이가 제멋대로 그린 낙서에서도 재능을 발견하는 어머니의 마음일까.

어느 쪽이든 발레 선생님은 지금 열반의 경지에 올랐다.

웃음 참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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