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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미래 Mar 01. 2024

오늘도 불안 버튼이 켜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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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분한 근거도 없이 다른 사람을 나쁘게 보는 생각.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가 ‘편견’을 정의한 말이다. 나는 이 편견이란 걸 갖지 않고 사람을 대하려 노력해 왔는데 최근 내가 얼마나 편견으로 똘똘 뭉친 인간인지를 깨달았다.  

  

  화요일 발레 수업은 이제 저녁 8시 30분이었다. 가장 초급 레벨인 0.5 레벨에서 1 레벨로 올라갔는데 그 수업이 조금 늦은 시간에 시작했다. 수강생은 초급반보다 훨씬 적은, 나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다.


발레 학원은 12층 높이 상가 6층에 위치해 있는데 대부분 학원과 독서실이 입점해 있어 저녁 9시가 넘어가면 스산해졌다.


미음자 형태로 상가들이 오밀조밀 들어있고 가운데에는 엘리베이터가 4대 운행되었다. 강의실과 학원 입구 문이 모두 유리문이라 은연중에 밖으로 시선이 가면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확실히 7시 수업보다 바깥에는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주변 상가들 불도 꺼져 어두워진 복도, 누구나 들락날락할 수 있는 유리문. 불투명 시트지가 붙어 있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겨우 한 시간 늦게 수업을 하는 것뿐인데 조금 달라진 환경에 내 불안 버튼이 켜졌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정확히 그 일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남편에게 나는,


밤에 수업 들으니까 누가 쳐들어올까 무서워.

라고 했다.


그럼 문을 잠궈.


그것도 좀 이상했다. 내가 원장도 아닌데 불안하다고 학원 문을 걸어 잠글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그냥 오버하지 말자고 요즘 흉흉한 뉴스를 너무 봐서 그렇다고 애써 넘기려 했다. 그러나 나의 불안 버튼은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에서 탁 하고 켜졌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문을 따고 들어올  있었던 서울의 자취방이 떠올랐다.  불안은 그때 가장 심했는데 자주 꾸는 꿈이 자취방에 모르는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내 일터에서도 불안버튼은 켜졌었다. 대로변에 있던 첫 번째 사무실은 외부 창과 문까지 통유리였는데 컴퓨터에서 고개만 빼꼼 들면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정도였다. 평소보다 작업이 늦어져 혼자 밤늦게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날, 누군가가 들어왔다.  


자전거 하이킹 복장에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인테리어 상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이킹 후에 인테리어 상담이라니, 미심 쩍었지만 사무실을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는 반갑게 응대했다.


목에 걸린 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치던 그는 앉자마자 커피부터 찾았다. 그 말은 거의 명령에 가까워서 나는 흠칫 놀랐다.


맥심 한 잔 줘 보이소.


그리고 뒤쪽에 있는 탕비실에서 등을 돌려 커피를 타고 있는 나를 향해,


여자 혼자 이런데 있으면 무섭겠다, 그죠? 내가 들어와서 무섭지 않아요? 여기 남자도 없는데.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스몰 토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그놈은 또라이였다. 여기서부터는 놈으로 칭하겠다. 커피를 천천히 나누어 마시며 시작된 인테리어 상담은 사실 희롱에 가까웠다.


그놈은 집 베란다에 있는 화분들을 모조리 한 군데에 넣을 수 있는 대형 화분을 제작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그런 건 조경 회사에 문의하는 게 더 좋겠다고 하자, 실실 웃으며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집에 어떤 화분이 있으며 어떤 흙을 쓰는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놈은 ‘오줌 타령’을 시작했다.


화분에 오줌을 누면 참 좋아요.


그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순간 멍해졌다.


내 아들놈이 이제 스물인데 매일 아침 빠딱 서서 거기 오줌을 누거든. 나도 누고. 그러면 화분이 진짜 잘 자란다니까?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을 띠며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불안 버튼은 켜지다 못해 발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최대한 눈으로 욕을 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화분이 잘 안 자란다 싶으면 거기 오줌을 눠 봐요.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했던가. 이제 사무실을 갓 개업한 서른 살의 초짜 사장이었던 나는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곧 다른 상담이 있으니 나가달라고 했던 것 같다. 그때 시간이 10시에 가까웠는데 그 말을 믿을 리 없던 그놈은 쓸데없는 말들을 잔뜩 더 늘어놓은 다음 흡족한 표정으로 나갔다.


나는 그놈이 나가자마자 창고로 뛰어들어가 망치 하나를 꺼내 들고 사무실 문을 잠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 그다음 날도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 책상 아래에는 망치 하나가 놓여 있다.


  불안은 학습된 결과다. 여성의 3명 중 한 명은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통계가 미심쩍다. 분명 모두일 것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아주 다채로운 희롱을 당해보았다.


앞서 밝힌 일화가 모르는 남자의 몸이 닿았던 순간들보다 덜 하다고 여길 수 없다. 신체를 접촉해 오는 희롱보다 사실 더 무서웠다. 바깥에는 행인도 별로 없었고 그 놈이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CCTV와 세콤까지 달았지만 내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었다.  


  이제 발레학원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야겠다. 수업이 막바지에 다다랐던 9시를 넘긴 그 시각. 유리문을 열고 한 남자가 소리도 없이 스윽 들어왔다. 새카만 옷을 입어 덩치가 더 커 보이는 30대 정도의 남자였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선생님이 1차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란 수강생들의 짧은 비명이 이어졌다.

부연하자면 평소 택배나 배달기사도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발레 학원에 남자의 방문은 거의 처음이었다. 선생님이 비명을 지른 건 단순한 놀람이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지금 수업 중이라......


선생님이 수업을 잠시 끊고 문을 열고 나갔다. 유리문 사이로 웅얼거리며 들려오던 소리를 유추해 보건대 그는 발레 상담을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때 물음표 하나가 켜졌다.


이 늦은 시간에 남자가 발레 상담을?


죄송하지만 지금은 수업 중이라서요, 나중에 학원 번호로 전화 주세요.


......


그럼 제 번호를 드릴까요? 아니면 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물음표가 하나 더 붙었다.


자기 번호를 준다고? 굳이? 선생님 번호는 왜?


아니요, 학원 대표 번호가 있어서요. 거기로 전화 주세요.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가 다녀간 5분여의 시간이 강의실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나만 불안 버튼이 켜져 있는 게 아니었다. 선생님도 다른 수강생들도 조금 긴장하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은 모두에게 공포였다. 팽팽하던 불안을 그 남자가 탁하고 끊었던 것이다.


저기! 또 왔어요!


수강생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그 남자는 미음자 모양의 상가를 한번 돌았는지 발레 학원 앞으로 다시 와서 문 앞에 잠시 머뭇거렸다. 우리가 다 같이 쳐다보자 돌연 사라졌다.


그때 선생님이 입구 문을 걸어 잠갔다.

음악을 다시 켜고 발레 수업이 진행됐지만 시선은 어쩔 수 없이 문 쪽으로 자꾸만 갔다. 그 남자가 또 올 것만 같았다. 불안 버튼이 켜지자 방어기제처럼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그 남자가 왠지 맞은편 복도에 아직 가지 않고 있을 것 같은 상상. 수업이 끝나길 기다려 선생님을 조용히 뒤 쫓아갈 것 같은 상상. 그는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몰래 지켜보던 스토커일 것이고 오늘 처음 행동에 나선 것이다!


놀라운 건 그 공간에 함께 있던 모두가 발레 상담을 받으러 온 걸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 발레에 관심이 많은 남자일지도 몰랐다. 우리가 빌리 엘리어트를 알아보지 못한 게 아닐까?


전혀 발레를 배울 것 같지 않게 생겼던데요?


수업이 끝난 후 모두가 입을 맞춰 이야기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거뭇한 수염에 다소 어두운 인상의 그는 발레보다는 범인의 몽타주였다.

문제는 그의 생김새였을까.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늦은 밤 무방비 상태로 어떤 공간에 있을 때 갑작스러운 남자의 방문은 모든 여성들에게 공포일지도 모른다고.


그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사실 무례한 행동이었을지는 몰라도 여성으로 살아온 방어기제에 가까웠다. 거기다 서두에 밝힌 편견이 한몫했다. 필라테스나 요가 수업도 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남자 수강생이 한 두 명쯤은 있었다. 발레라고 다를 리가 없는데, 그때까지도 나는 발레 수업에 남자가 들어오리라곤 상상을 못 했던 것이다.


다만 늦은 밤이었다는 것과 의심을 자아내게 했던 행동들은 아직도 의문이 든다.



학원 조명을 내리고 퇴근을 준비하는 선생님을 기다려 함께 나왔다. 불안한 마음에 상가 복도를 순찰하듯 돌았던 기억이 난다.


세상이 무서우니까요.


신경이 곤두선 여자 넷은 그렇게 씁쓸하게 소동을 마쳤다.


그리고 몇 주 후,


발레 수업에 그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정말로 발레가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초급 발레리노 기본 복장이라는 딱 붙는 검은 반팔 상의와 타이즈, 반바지를 갖춰 입고 수업에 들어온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를 오해해서 미안함과 동시에 그를 향한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근거 '있는' 편견은 더 위험하다. 왜냐면 나는 아직도 사실 그 남자가 불순한 의도는 없는지 예의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같은 수업에 들어온 어린 여자 아이를 쳐다볼 때 나는 보았다. 그의 얼굴이 다소 붉어지는 것을.



아, 이러다 신경 쇠약에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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