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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미래 Feb 08. 2024

거울 앞에 맨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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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발레 학원의 거울이 무섭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 앞에서 춤만 추라고 해도 두려울 텐데 거의 맨 몸을 드러낸 레오타드를 입고 있다. 이 정도면 MBTI 대문자 I에게는 충격요법에 가깝다. 외향인들이야 조명이 환하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 앞에 서면 프리 마돈나가 된 기분이겠지만 나 같은 극 내향인에게 발레학원은 미니멀한 지옥이다.  


  첫 수업을 마친 후 발레복을 사야 했다. 길게 늘어진 옷 때문에 엉덩이 근육과 허벅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아서였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가장 많이 내지르는 3단 고함은 ‘힘, 힘!, 힘!!!’이다. 그녀는 승모근이나 무릎, 엄지발가락까지 힘을 주고 있는지 늘 체크했다. 


  발레복을 입으면 확실히 다를 거라는 말의 진위도 궁금했다. 발레도 시작한 마당에 더 못할 일이 있으랴. 사실 요가복도 불편하진 않았지만 발레리나 복장들 사이에서는 망토 없는 슈퍼맨 같았다. 


  구매 목록은 레오타드, 발레 스타킹, 시폰 스커트였다. 여러 쇼핑몰을 둘러보고 장바구니에 담았다 삭제하기를 수 십 번. 명화가 그려진 레오타드와 오로라 무늬의 스커트가 끝까지 어른 거렸지만 결국 초심자들을 위해 디자인된 하늘색 레오타드와 회색 스커트를 택배로 받았다.  


  갓 개봉한 택배 박스에서 싱싱한 레오타드를 건져 올리자 남편은 그게 정말 옷이냐고 물었다. 나 또한 어느 구멍에다 팔을 넣어야 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레오타드는 원피스 수영복과 같지만 다르다. 재질이 훨씬 얇고 타이트하며 무엇보다 작았다. 


  다리를 끼우고 어깨끈을 힘껏 잡아당겨 팔을 넣으니 그 얇은 천이 놀랄 만큼 늘어났다가 반동으로 온몸을 팽팽하게 조였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지하철 1호선에서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세일즈맨이 큰 손에 가볍게 끼워 넣던 작디작은 요술 장갑이 떠올랐다. 그러나 내 몸은 날렵한 그 손바닥 보다 인생의 굴곡이 많았으니, 레오타드는 옆구리살의 두툼한 등선을 그대로 투영하며 갈비뼈 사이사이까지 밀착되었다.       


실밥 터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레오타드를 겨우 걸쳤건만 바닥에 스타킹이 놓여 있었다. 아차, 스타킹을 먼저 입어야 했다. 나는 내 몸에 착 들러붙은 두 번째 피부를 조심히 벗겨냈다. 그러곤 다시 스타킹을 신고 다시 앞선 과정을 거쳐 레오타드를 입었다. 기다렸다는 듯 긴장한 아랫배가 꿈틀거렸다. 레오타드는 내 대장까지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다시 일련의 순서들을 리버스 했다.  


  엄마의 생경한 행색을 본 아들이 천진난만한 평을 남겼다. 결코 악의는 없었다.  

아빠, 엄마 봐. 완전 귀여워, 미키 마우스야. 

아니, 저건 스머프 란다. 

아, 미키마우스와 스머프도 타이즈만 입고 산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일깨워 주었다. 덕분에 학원 가기가 더욱 싫어졌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늘어진 뱃살과 굽은 어깨를 거울로 확인하는 것은 사실 이차적인 문제다. 나는 평생을 익숙한 것만 찾아왔고 새로운 장소나 사람을 만나면 잔뜩 긴장하는 인간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이나 지적을 받는 일 또한 버겁다. 엄마의 말대로 내가 ‘얼띠’라서 그럴 수도 있고 항상 최악을 생각하는 습관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더 나를 괴롭힌다. 발레 학원을 등록하고 나서도 내 안에서는,  


이 나이에 무슨 발레냐. 

그 돈이면 아들 학원이나 더 등록해 주지. 

같은 말들이 들려왔다. 


  엄마와의 통화가 아니었다면 발레는 영영 내 인생에 한 스텝도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발레를 다닌다는 말에 엄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래서, 학원비가 얼만데, 하지 마라’ 고 일갈했다. 


  엄마는 내가 여행을 계획하면 가지 말라고 했고 뭘 산다고 하면 사지 말라고 했다. 나는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였고 그 말을 어기면 스스로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죄책감은 이내 습관이라는 모양을 하고 불안이라는 얼굴이 되었다. 어느 날 나는 내 나이의 엄마와 닮아 있음에 흠칫 놀란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실제로 불행이 닥치면 대책 없이 부서져 내리며 휩쓸린다. 


  4면이 다 닫힌 공간에 들어가면 가슴이 갑갑하고 얼굴이 붉어진다는 걸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지만 자책하고 괴로워할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아들에게는 삶의 힘듦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나는 달라져야 했다.    

  


  강습실은 언제나 덥다. 미리 몸을 데워 관절과 근육이 풀리게끔 하는 것이다. 한 여름에도 발레리나들이 워머나 땀복을 껴입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나는 부상을 입어도 좋으니 에어컨을 켜거나 창문을 활짝 열어달라고 하고 싶다. 이 놈의 폐소공포증부터 없애고 수업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음악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한 번에 알아보았다. 강습실 구석에 놓인 고가의 제네바 스피커를. 저게 왜 있나 싶었는데 발레 수업 내내 음악이 함께 했다. 스트레칭을 시작하는 곡은 언제나 정재형의 피아노곡 ‘오솔길’이다. 


  피아노 선율이 물방울처럼 똑똑 떨어지면 가만히 눈을 감는다. 숲 속을 거니는 것 같다. 하루 종일 뻣뻣하던 목이 자연스레 느슨해진다. 투명한 건반을 누르듯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가며 머리를 당기면 엇박자로 뛰던 마음도 어느 정도 진정 된다. 


  60대의 한 수강생이 있다. 그녀도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다. 수강생들의 연령은 17살 입시생부터 3, 40대까지 다양했는데 60대는 유일무이했다. 그녀가 택한 적응법은 선생님과의 스몰토크였다. 수업 시작 전 옆에서 들려오던 그 대화에 나는 조용히 공감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발레를 하고 싶었으나 뒤늦게야 도전한다는 것과 매주 오는 발레 수업에서 힘을 얻어간다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말하는 힘은 다리에 차오르는 근육일까, 아니면 젊어지는 기분 같은 걸까. 처음에는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겠다. 우리는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묘한 동지애를 느낀다. 레오타드를 입고 오는 것부터 새로운 동작을 배우는 것 하나하나가 관문이다. 서로가 그 힘든 문턱을 통과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응원을 하게 된다. 


  다리를 180도로 찢어 앞으로 넘어가는 스트레칭이 있다. 처음엔 7명의 수강생 모두가 실패했는데 6개월에 접어들자 대부분이 성공했다. 나는 아직도 안 되는 동작이지만 한 명씩 성공할 때마다 내심 박수를 쳐주었다. 수강생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덕담이 ‘정말 많이 느셨네요’다. 다들 서로에게 관심 없는 듯 보이지만 각자의 고군분투를 지켜보고 있다. 


  스스로를 발레답지 못한 몸매라 칭하던 수강생은 실은 제일 유연해서 누구보다 발레리나 같다. 아무도 바 높이만큼 발을 차올리지 못할 때 그녀는 180도 각도로 다리를 찢어 올렸다. 그녀가 수강을 취소하기 전에 이 말을 해주었어야 했는데, 그 유연한 다리를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게 너무나 아쉽다. 


  나는 발레가 아주 더디게 느는 대신 결석률이 제로에 가까운 점이 모두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실은 하루만 빠져도 몸이 원위치로 돌아가서였는데, 정말 열심히 다니시네요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발레라는 새로운 세계에 나를 던지니 단조롭던 일상에 파문이 일었다. 온 나라가 코로나에 걸리고 그 후유증처럼 사업 위기까지 겪고 나니 시간이 말 그대로 삭제되어 있었다. 4년 가까운 그 시간은 술을 마시던 해, 불면증에 걸린 해, 돈에 허덕이던 해, 불안과 싸우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한 없이 괴로웠던 것 말고는 남은 것이 없다. 계속 이렇게 한 해 두 해 보내고 나면 또 무엇이 남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끝 모를 우주 한가운데 점이 된 듯 공허함이 밀려온다. 


발레를 하길 잘했다. 비록 수업 내내 빨간 홍당무 얼굴을 하고서 숨이 가빠질지라도, 조금씩 발레라는 세계에 익숙해진다. 


‘바닥 보지 마세요!’ 


  선생님의 지시가 날아온다. 나는 턱을 치켜들어 꽉 닫힌 창밖을 응시한다. 물에 빠져 버둥대던 나는 땀으로 젖은 손으로 바를 움켜쥐고 온전히 두 발끝으로 선다. 시선은 최대한 먼 곳으로. 숨을 가로막는 저 암막 커튼을 열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상상한다. 


갑갑해도 죽지 않는다. 나는 괜찮다. 나는 살아 있다. 계속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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