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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미래 Jan 26. 2024

비틀어진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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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의 어느 어두운 아침, 이른 장마로 축축해진 이불더미 아래 목이 돌아가지 않는 마흔 살의 여자가 마네킹처럼 누워 있다. 범죄 현장도 아니고 학대 현장도 아니다. 오랜만에 꿈도 없는 긴 잠을 자고 빗소리에 창 밖을 보려던 나는 스릴러 영화처럼 눈동자만 돌릴 수 있었다. 어제까지는 멀쩡하던 목의 근육들이 밤 새 시멘트라도 부어놓은 양 완전히 굳어 버린 것이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어 돌리려 하면 목이 뽑히는 듯한 찌릿한 고통에 억, 억, 고장 난 로봇 같은 오류 음만 내지를 뿐이었다. 그나마 나머지 팔, 다리는 멀쩡하게 작동해서 목을 최대한 고정시킨 채 팔과 다리의 반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조짐은 있었다. 컴퓨터 작업을 할 때마다 왼쪽 승모근이 긴장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무 예고도 없이 목이 작동을 멈출 줄이야. 

 

  나는 그 길로 집 근처 도수 치료사를 만났다. 도인과 같은 복장의 치료사는 


‘자 여기를 누르면 여기가 올라가지 않는데... 이렇게 하면 이제 올라가죠?’ 


라며 내 몸 곳곳에 틀어진 부분을 엉킨 실타래 풀듯 누르고 당겼다. 

한 시간이 넘도록 치료가 이어졌지만 목은 여전히 아팠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명 ‘카이로 프랙틱’이라고 하는 동작이 예고도 없이 들어갔다. 카이로 프랙틱은 손으로 관절을 맞추는 치료법인데, 치료사는 목에 힘 빼세요,라는 짧은 예고와 함께 말 그대로 내 목을 비틀어버렸다. 그의 손동작은 영화에서 적을 기습하는  암살 장면, 또는 닭 잡는 자세와 아주 유사했다. 


그래도 나는 죽지 않았다. 치료사는 관절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병뚜껑인양 목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길에 떨어진 동전 정도는 자연스럽게 주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내 몸이 완전히 틀어졌다고 했다. 출산으로 골반이 비뚤어졌고 바로 잡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으며 둘째를 출산하면 반반 정도의 확률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했다. 생기지도 않은 둘째에게 내 골반의 미래가 달렸다. 참으로 암담했다. 그런 비관적인 말들에 덧붙여 꾸준한 운동도 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운동이라니, 절망적이다. 

  목이 그 정도로 아프지 않았다면 병원에 제 발로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십견 정도로 치부하고 방치했을 게 분명하다. 어떤 일에도 의지가 없었다. 자잘하게 발 끝에 굴러오던 모래알 같은 불운들이 단단한 자갈이 되어 덮치던 시기였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굴러 없어질 것들이었는데 그 당시의 나는 자꾸만 그 앞으로 가서 걸려 넘어졌다. 


그냥 피하면 되는데, 없는 척하면 되는데. 불행은 모래알에서 자갈로, 그리고 바위의 형태가 되어 짓눌렀고 나는 벗어나는 대신 버티는 쪽을 택했다. 목이 고장 난 것은 거북목도, 과잉 업무도 아닌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바위 때문이었다. 치료사의 말대로 운동은 내 목을 낫게 해 줄 뿐 아니라 어쩌면 돌파구일지도 몰랐다. 


  몸에 힘을 기르면 내면도 저절로 길러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솟았다. 그렇다면 어떤 운동을 해야 할까. 요가, 필라테스, 헬스까지는 해봤고 주변에서 종교 전도처럼 권유하는 골프는 왠지 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운동이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길에서 마주친 발레 원장님이 떠올랐다. 원장님은 나의 고객이었고 발레학원의 공간 디자인과 로고 작업을 마친 직후였다. 몇 주 동안이나 발레 사진을 보고 도안을 그렸지만 그때는 몰랐다. 취미 발레라는 영역이 있을 줄.    


발레리나 라고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 나풀거리는 시폰 재질의 튀튀 스커트, 살구색 스타킹 위로 드러난 힘줄, 발 끝으로 선채 허공으로 점프하는 모습들이 떠올랐고 도무지 거기에 나를 대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원장님을 마주하고선 내 눈 앞을 가로막던 현란한 레이스들이 걷혔다. 그녀는 국립 발레단 출신에 평생 발레만 했을 것 같은 우아한 발레리나 그 자체였지만 어떤 운동 코치들보다 단단하고 꼿꼿해 보였다. 바람에 유연하게 구부러지지만 절대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 같달까. 

그 지점에 나는 사로잡혔다. 비틀어지고 비뚤어진, 결국엔 작동마저 멈춰버린 로봇 같은 내가 어떻게 하면 저분처럼 될 수 있을지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몸은 언제나 나를 좌지우지해왔다. 비가 오거나 어두운 아침이면 오후 약속을 취소하고 싶어 졌고 더워서 축 처지는 날에는 아이에게 유독 신경질 적으로 굴었다. 몸은 우리가 그에 얽매이고 흔들리는 것을 용인해 주는 순간 더욱 행패를 부린다. 내 목이 완전히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이대로 살다가는 내 몸에 질질 끌려가 결국 갇혀 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 

무슨 수를 쓰긴 써야 한다. 그것이 발레, 역도, 투포환 던기지든, 그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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