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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게 흐르는 피아노 소리. 창가의 트리 장식 그림자가 오너먼트처럼 드리워진 댄싱 플로어.
우아한 복장을 한 성인반 발레리나들이 매트 위에 몸을 풀고 있다.
‘아이고!’
‘윽, 으으으 으아아악!’
공포의 개구리 자세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두 다리를 90도로 구부려 위에서 보면 디귿자의 형태로 만드는, 당연히 골반이 뜰 수밖에 없는 자세다. 구부정한 앉은뱅이 생활을 하던 업보로 내 골반과 허벅지는 누구보다 공중 부양해 있다.
골반이 말랑한 아이들은 껌 씹듯 하는 이 동작이 마흔이 넘은 나에게는 매번 극락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것은 서서히 다가오는 선생님의 발자국 소리. 속으로 오지 마! 내질러도 소용없다.
내 나름의 최선을 다 하고 있건만 골반은 자꾸만 솟구치고 허벅지는 달달 떨린다.
선생님의 눈을 피할 턱이 없다. 그녀는 고쳐야 할 고철 덩이라도 발견한 듯
아니 이게 바닥에 붙어야 하는데!
라며, 온 체중을 손바닥에 실어 골반을 바닥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 연약한 손목에서 어찌 그런 백두장사 같은 힘이 나오는지. 녹슬 대로 녹슨 골반이 아주 잠깐 쑥 내려갔다. 비명도 나오지 않는 고통이었다.
저마다 내지르는 비명 소리, 굴욕적으로 엎드린 자세, 골반을 열고 있는 여인네들. 그렇다. 이 장면은 출산하던 날과 위화감없이 겹쳐졌다. 나는 12월 23일에 아이를 낳았는데 마침 또 12월 초라 그때처럼 캐럴이 흐르고 있었다. 거기다 개구리 자세를 한 산모들의 곡소리가 귓가에 서라운드처럼 울려 퍼진다.
더! 더! 더!
이제는 선생님이 간호사로 보이기 시작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올 것 같았다.
내 뻣뻣함의 역사는 유구하다. 체력장에서 유연성을 테스트하는 일명 전굴 자세, 등을 구부려 발 끝을 손으로 잡아야 하는 이 자세가 내 기억에 4살 이후로 된 적이 없었다. 그땐 팔, 다리 길이가 같았으니 가능했을 것이다.
발레는 기본적으로 유연성을 요구하는 동작이 대부분이다. 바를 잡고 하는 바 워크 시간에 발레리나 발 끝 흉내라도 내려면 스트레칭 때 비명을 꽥 꽥 질러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속으로 악을 써댔지만 이제는 부끄러움 없는 괴성이 나오곤 한다.
유연성이라곤 혓바닥에만 있는 저주받은 몸이라면 안타깝지만 발레가 2배는 힘들 것이다. 그래도 성취감은 몇 배 이상이에요!라고도 말 못 하겠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게 늘기 때문이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듯이, 유연성은 꽤 많은 시간과 수강료로 얻어질것이다. 6개월 차에 접어들자 두 발을 바깥으로 열고 다리를 붙이고 서는 기본자세에서 아주 미세하게 무릎이 붙는 것을 발견했다. 줄 자라도 들고 다니며 그 치수를 기록하고 싶을 정도로 미세했다. 그래도 그전까지는 아기 주먹 하나는 들어갈 정도로 벌어졌었는데 장족의 발전이었다.
발레는 그런 점에서 골프와도 비슷하다. 남편은 6년이 넘도록 골프를 치고 있지만 크게 늘지 않았다. 매번 패잔병이 되어 필드에서 돌아오는 그에게서 내 미래를 본다. 골프나 발레가 그럼에도 매력적인 이유는 어느 날 공이 잘 맞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번.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포인트다. 나 좀 늘었나 싶다가도 어느 날은 원점으로 돌아가있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다리를 차올리는 바트망이 제법 잘 되기도 한다. 그럼 선생님은 이런 멘트를 날려 주었다. 마치 캐디처럼.
좋아! 지금 좋았어요!
여러분, 이 분이 원래 이렇지 않았거든요!
계속하면 되는 겁니다!
장장 6개월 동안 나는 한 번의 결석도 없이 뻣뻣한 근육을 늘려왔다. 온몸을 비틀고 늘여주기를 반복하니 엿가락 뽑히듯 등과 목의 라인이 달라졌다.
회원님, 처음에 이렇게 들어오셨잖아요.
선생님이 굳이 진화 이전의 나를 시범 보였다.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목을 거북이처럼 내미는 게 유인원이 따로 없다. 나는 그 모습이 과장이 아닌 걸 안다. 실제로 스마트폰을 비롯해 밝은 네모 들에 붙어사는 현대인들 대부분이 고질병처럼 거북목이 되어 가고 있다.
몸은 그런 매일이 쌓여 이상한 모양으로 굳어져 버린다. 학창 시절의 미술 시간, 친구들과 노는 사이 고칠 수 없게 굳어진 흉측한 지점토 인형처럼 내 몸이 그랬다.
발레의 많은 동작은 목을 꼿꼿이 세워야 하고 등은 펴고 승모근은 힘을 풀어야 한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디아나 비쇼네바의 영상을 보면 발레를 통해 몸의 라인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그녀는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는 새틴 리본 같기도 하고 한쪽 다리를 180도로 올려 완벽하게 선 모습은 아름다운 조각 작품 같기도 하다.
취미 발레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기대하긴 어렵다. 유튜브로 세계적인 발레리나들의 공연을 보다가 거울로 종이 인형처럼 허우적거리는 팔다리를 마주하면 헛웃음이 난다. 비교할 필요도 없지만 그들과 나는 하늘과 땅 차이도 아니고 하늘과 멘틀 아래 차이다.
지금은 내 몸을 바로 세우는 것, 그뿐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바를 잡지 않으면 서는 것조차 힘들다.
발레 동작이 유독 힘든 이유는 살면서 전혀 하지 않는 동작들이 많아서다. 기본자세부터가 당황스럽다. 매일 연습하는 턴 아웃은 무릎뼈와 발 끝이 바깥으로 향하게 하는 자세다. 발레리나들이 무대에서 걸어가는 것을 언뜻 보면 팔자걸음으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턴 아웃은 다리를 더 큰 각도로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위해서 인데 평생 11자로 걸어온 일반인들에겐 쉽지 않다. 첫 수업 다음 날 무릎이 가장 아팠던 것도 턴 아웃을 제대로 못 해서였다. 자꾸 휘청거리는 몸을 잡으려고 무릎에 과도한 힘을 준 게 화근이었다.
팔 동작은 또 어찌나 복잡하지. 양팔을 백조처럼 들어 올리는 ‘알라스콩드’는 언제나 지적을 받는다. 선생님의 시범을 보고선 그냥 팔을 큰 기둥을 안듯이 들어 올리면 되겠다 싶었는데 팔꿈치는 위로, 손바닥은 정면으로, 팔뚝은 걸레 짜듯 팽팽하게 비틀라고 한다. 구체 관절 인형처럼 서 있으면 선생님이 틀린 부분을 돌리고 잡아당긴다. 그러자 아무렇지 않던 팔뚝 안쪽 근육이 당기고 손목까지 아려왔다.
신호가 오죠? 이게 제대로 에요.
선생님의 얼굴이 간호사에서 고문관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 발레 동작들은 제대로 하면 온몸이 고문받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얼굴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어야 한다. 허벅지 근육이 찢길 듯 주리가 틀리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면,
지금 얼굴 너무 무서워요! 자 다 같이 스마~일.
이제 선생님 얼굴이 소시오패스로 보인다.
터질 것 같은 근육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반가사유상의 미소까지 입가에 머금으려면 3년은 족히 수련해야 할 것 같다. 발레리나의 웃는 얼굴 또한 엄청난 수련의 결과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 미소 뒤에는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의 시간이 있었을까. 발레리나가 아니더라도 그런 얼굴을 마주할 때가 있다. 어떤 고통 속에도 강철 같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들. 비록 내 몸은 그들과 같을 수 없을지라도 그 미소만은 닮고 싶다.
오늘도 거울에 비친 내 토르소에게 최면을 걸어 본다. 지금 뒤틀리는 건 허벅지 근육이지 내가 아니다. 목 아래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것들은 잊자, 모른 척해야 한다.
비록 거울 속엔 시뻘건 얼굴이지만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마-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