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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미래 Jul 15. 2024

홍조의 역사

photo_네이버 영화 미쓰홍당무





1년간 매주 발레 수업을 함께했던 선생님과 작별하는 날이었다. 

대학원을 다니던 Y 선생님은 수업을 더 이상 병행하기 힘들었는지 그만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의 발레 첫걸음마(?)를 뗄 때부터 함께한 분이었기에 아쉬움이 컸다. 


평소 40개 하던 복근운동은 50개로, 센터 수업 전 물 마시는 시간도 생략하며 

땀의 대미를 장식한 수업이 끝난 직후였다. 

반 울상을 짓고 있는 내게 원장님이 사진을 제안했고, 나는 용감하게도 Y 선생님 옆에 섰다. 


28살의 하얀 달걀같이 고운 얼굴에 아이돌 이목구비를 가진 Y 쌤과 사진을 찍은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구도를 잡던 원장님은 우리의 투샷에 잠시 당황하더니 

엇, 아... 화면을 좀 더 밝게 할게요. 라며 폰 화면에 손가락을 쭈욱 대고 늘리거나 무언가를 마구 클릭했다. 30대의 노련한 촬영 스킬을 보며 나는 다소 안심하고는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었다. 


사진을 찍기 전에 거울이라도 봤어야 했는데, 며칠 후 받아 든 사진을 보고 나는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누구야... 누가 내 얼굴에 프라이팬 집어던졌어...... 

이마 가운데에서부터 코, 양 볼과 턱까지 내 얼굴은 동그란 무언가에 데거나 얻어 맞은 듯 발개져 있었다.

원장님이 밝기 조절을 최대한 한 게 그 모양이었다. 


뒷 배경인 아이보리 색 발레실 벽면이 유독 새 하얘진 것과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거의 터질 듯 발광하고 있는 걸 보고 원장님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허나, 내 옆에는 원래도 예쁜 선생님이 화사한 꽃다발까지 들고 있어서 

사진은 마치 인생의 희비극을 한 컷에 담은 것만 같았다. 

사진 아래 부제를 단다면 이렇게 써놓고 싶을 정도로. 

'발레로 때려 맞은 여자'


그동안 수업을 마치고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땀이 샘솟아 번들거리고 붉어진 얼굴을 보고는 당황해 더 시뻘게졌기 때문이다. 

인사이드아웃 2에 나오는 당황이처럼 내 얼굴을 가려줄 후드도 없으니까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튀었다. 


얼굴이 원래 이렇진 않았다. 나는 학교를 다닐 때에도 엄마가 내심 자랑스럽게 여길 만큼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또랑또랑 발표도 잘했고 거짓말도 잘했다. 20살에 처음 술을 마시곤 얼굴이 새 하얘지는 걸 보고 소개팅할 때 술집부터 가는 걸 선호했고 얼굴이 시뻘게지는 일은 정말 비빔면으로 싸다구를 맞아야 가능했다. 


가만히 되짚어보니 내 홍조의 시작은 서른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임신을 했다. 

애를 가지면 체질도 바뀌고 뼈대도 다 바뀐다더니 나는 얼굴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붉은 여드름이 이마와 볼에 하나 둘 생기더니 불이 옮겨 붙듯 얼굴 전체로 퍼져나갔다. 


임신 4주 차였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피부과 약을 지어먹었다. 

다행히 출산 후 아이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시어머니는 어찌 그리 모를 수가 있냐며 타박했다. 

본인은 무려 막달까지 임신 울렁증으로 누워있었고 계속 토를 해 소금물로 연명했다는 무용담을 마치 알에서 나온 박혁거세의 이야기처럼 들려주었고 나는 점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배가 불러오는 것과 같은 속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남들은 예쁜 드레스를 입고 기념 촬영도 하던데 임신 기간 내내 내가 남긴 사진이라곤 배 클로즈업샷, 뒷모습뿐이었다. 


얼굴은 마스크팩 모양으로 붉은 여드름이 뒤덮었고 살이 찌니 호빵맨처럼 코도 커졌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는 게 고통이었다.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열 달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남편 없이 외출을 해야 할 때가 곤혹스러웠는데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최대한 가리고 다녔다. 

몸무게 앞자리 숫자가 세 번 바뀌었고 거울에 비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출산 디데이에 나는, 헬보이가 되어 있었다.  


유도분만에 실패하고 수술대에 누웠을 때 마취약에 정신을 잃어가며 들었던 간호사의 마지막 말이 

이 산모 얼굴이 왜 이래! 였으니, 이 괴물은 뭐야 라는 말이라도 안 듣길 다행이다.  


인체의 신비란 얼마나 놀라운지. 출산과 동시에 얼굴은 거짓말처럼 말짱해졌다. 하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출산 이후로도 생리를 앞두면 꼭 여드름이 생기는 거였다. 여드름은 이제 약으로 다스릴 수 있었지만 수시로 붉어지는 얼굴이 문제였다. 


어, 이러다 얼굴이 붉어지겠는데?라는 생각만 해도 열이 올랐다. 

아무리 부끄러운 짓을 해도 얼굴은 뻔뻔하게 들고 다닐 수 있었는데, 망했다. 


처음에는 발레 수업 내내 마스크를 꼈다. 그러나 마스크에 갇힌 얼굴의 열기는 활화산처럼 이마로 향했고 

수업을 마치고 난 얼굴은 용암을 뒤집어 쓴 듯 했다. 


차라리 보지 않으면 좋을 텐데 레슨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이 문제였다. 


거울 좀 보세요! 


자기 모습을 보는 게 어색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거울을 똑바로 보세요. 


늙으면 점점 거울 보기가 싫어진다더니, 나는 노화보다 발화가 먼저 되었다. 


괜찮아요. 내 얼굴은 나만 봐요. 


선생님 말이 맞았다. 생각해 보면 다른 수강생들 몸매나 옷은 힐끔거리며 살폈지, 정작 얼굴은 안 봤다. 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큰일이니까. 그들도 내 얼굴이 이렇게 붉어지는 걸 실은 신경 쓰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홍조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냉혈한 같던, 약간은 이기적이었던 내 성격에 따스한 온기같은게 생긴 거라 여기기로 했다. 

나와 닮은 아이가 생긴 것처럼 내 몸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봉숭아물 같은 자국이 생긴 거라고. 


수업 다음 날 아침까지도 발그레한 이 홍조를 보며,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내내 수줍어 보일 이 표식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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