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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Jul 19. 2024

답습만 해서는 안 된다

모호한 법조문으로는 법치사회는 멀었다

담보부사채신탁법이란 법이 있다. 1962년 1월에 제정되었으니 꽤 오래된 법이다. 놀라운 것은 이때 부칙은 다음과 같다.


부      칙 

①(시행일) 본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②(폐지법령) 1920년 칙령 제533호 담보부사채신탁법을조선에시행하는건은 이를 폐지한다.


담보부사채신탁법의 뿌리가 1920년 칙령 제533호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1962년까지 시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일제가 만든 법령이 얼마나 오래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칙령이 폐지되고 1962년 1월 제정된 담보부사채신탁법의 제87조는 다음과 같다.


제87조 (신탁업자의 해임) 신탁업자가 그 업무에 위반하거나 신탁업무를 처리함에 부적임할 때 기타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재무부장관은 위탁회사 또는 집회의 신청에 의하여 신탁업자를 해임할 수 있다.


'그 업무에 위반하거나'가 눈에 확 들어온다. 민법에 자주 등장하는 '~에 위반하다'가 이 법에도 쓰이고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우리나라 법률가들이 일본어에 물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다라는 말에 일본어에서는 조사 ''를 썼고 이를 습관적으로 ''로 옮겼던 것이다. 이것이 잘못임을 깨달은 후속 세대는 법률을 개정하면서 ''를 ''로 바꾼다. 담보부사채신탁법이 2011년 개정되면서 제87조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제87조(신탁업자의 해임) 금융위원회는 다음 각 호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위탁회사 또는 집회의 신청에 의하여 신탁업자를 해임할 수 있다.

1. 신탁업자가 그 업무를 위반한 경우

2. 신탁업자가 신탁업무를 처리하기에 적합하지 아니한 경우

3. 그 밖에 신탁업자를 해임할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전문개정 2011. 5. 30.]


'그 업무 위반하거나'가 '그 업무 위반한'으로 바뀐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일본어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는 '그 업무 위반하거나'를 '그 업무 위반한'으로 바꾸었으니 그렇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업무를 위반한'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위반하다'는 목적어로 '규칙', '법규', '규정', '지침', '약속' 등과 같은 말이 올 수 있지 '업무'가 올 수는 없다. '업무를 위반한다'가 무슨 뜻인가. 1962년에 쓴 표현을 단지 조사만 바로잡았을 뿐 그대로 쓰고 있다. 답습이 최선이 아니다. 법은 뜻이 명료하게 드러나야 한다. '업무를 위반한 경우'가 무슨 뜻인지 분명한가. 아니라고 본다. 모호한 법조문으로는 법치사회가 구현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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