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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3시간전

원군을 만나니 힘이 난다

보이지 않는 문법이라고 소홀히 하나

아침에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폰에서 낯선 전번이 떴다. 070 같은 게 아니고 010이니 일단 스팸 의심은 덜 가지만 그래도 모르는 번호니 경계심을 가지고 전화를 받았다. 젊은이 목소리였는데 한동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차츰 경계를 풀어갔다. 그는 내 책 <민법의 비문>을 읽고 아주 공감해서 전화하는 거라 했다. 책 뒤에 있는 출판사 전화번호를 이용해서.


목소리는 젊었지만 알고 보니 이미 50대 중반이었다. 예비역 소령이었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한 지 여러 해 지났다고 했다. 행정사 자격도 가지고 있고. 그는 주택관리사 시험을 준비 중이라 했다. 그 시험 과목에 민법이 들어 있는데 어떤 기회에 <민법의 비문>을 알게 되고 책을 사서 읽어본 모양이다. 그리고 공감한 나머지 전화까지 건 것이라 했다.


그는 책을 꼼꼼히 읽은 흔적이 있었다. 나는 <민법의 비문>에서 민법 제162조의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는 틀린 문장이라고 지적했다.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가 맞다고 말이다. 자기도 그 조문을 읽으면서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내 책을 읽고 비로소 그 조문이 이상하다고 느낀 자기가 잘못이 아니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전에 법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다른 한 분이 그 비슷한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오늘도 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문법적으로 틀린 법조문이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 통화에서 그는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주택관리사 시험 민법 문제에 "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라는 게 나왔다는 것이다. "다음 중 틀린 것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지 중 하나로 "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가 나왔던 모양이다. 물론 '사단법인'이 맞고 '재단법인'은 틀렸다. 민법 제77조 제2항은 "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의 이야기가 내게 흥미로웠나.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라는 민법 조문 자체가 문법적으로 틀렸기 때문이다.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가 있을 때도 해산한다."라야 문법에 맞다.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는 마치 "결석하거나 지각에도 야단맞지 않았다."나 마찬가지다. "결석하거나 지각에도 야단맞지 않았다."가 말이 되나. "결석하거나 지각해도 야단맞지 않았다."라야 말이 되지 않나. '결석하거나'라는 동사가 왔으면 뒤에도 동사가 와야 한다. 출제자의 의도는 '단법인'이 아니라 '단법인'이라 했기 때문에 틀렸다는 것인데 그 이전에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자체가 문법적으로 틀렸다. 


통화 중에 그는 왜 민법의 숱한 문법적 오류가 고쳐지고 있지 않는지 내게 물었다. 답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난감한 나머지 사람들이 '게을러서' 오류를 바로잡지 않는다고 하니 그는 잘 수긍하지 못하는 듯한 눈치였다. 요컨대 법을 가르치는 교수나 법을 배우는 학생이나 '문법'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문법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인데 문법을 어겨 놓고도 어긴 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 모르는 사람과 무려 27분이나 통화했다. 공감대가 있었기에 그리 오래 통화했을 것읻다. <민법의 비문>, <대한민국의 법은 아직도 1970년대입니다>가 요즘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뜻밖의 원군을 만나 힘이 솟는다. 정치판은 오로지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을 뿐 국가의 기본이 되는 법이 엉망이어도 오불관언이다. 지난 수십 년을 그래 왔다. 민초의 힘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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