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문은 엄중하고 그래서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법조문의 특징은 명료함이다. 명료하다는 것은 뚜렷하고 분명하다는 것이다. 법조문은 명료해야 뜻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래서 오해를 막을 수 있다. 만일 법조문이 애매모호하다면 법조문으로서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할 것임은 당연하다. 법조문은 한없이 엄중하고 그래서 조금도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6법은 1950년대에 제정될 때 무척 허술하게 만들어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완벽을 기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당시의 법률가들은 법에는 밝았겠으나 우리말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래서 명료하지 않은 법조문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조문이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민법 제77조는 법인의 해산 사유에 관해 규정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제2항을 보자.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는 비교적 짤막한 문장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가 없다. 명료하지 않고 알쏭달쏭한 느낌을 자아낸다. 뜻을 알듯말듯하다.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는 문장으로서 아주 실패작이고 도저히 법조문에서 있어서는 안 될 문장이다.
왜 이 문장이 명료하지 않고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는가? 이유가 있다. 이 조문의 뜻은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될 때 혹은 총회의 결의가 있을 때 해산한다는 것이다. 사단법인은 사람이 모여 이루어지는데 사람이 하나도 없어지면 해산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사단법인은 총회가 해산을 결의할 때도 해산한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묶어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라고 한 것인데 ‘사원이 없게 되거나’와 ‘총회의 결의’가 잘못 연결되었다. ‘사원이 없게 되거나’는 동사 ‘되거나’가 있어서 동사구이다. 이에 반해 ‘총회의 결의’는 ‘결의’가 명사기 때문에 명사구다. 접속은 동사구끼리 하든지 명사구끼리 해야 하는데 동사구와 명사구를 접속하고 말았다. 다른 종류의 구를 접속했기 때문에 이상하게 느껴지고 뜻이 명료하지 않다. 문법을 어긴 것이다.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는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가 있을 때에도 해산한다.”라고 할 때 비로소 뜻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민법 제77조 제2항 “사단법인은 사원이 없게 되거나 총회의 결의로도 해산한다.”는 이런 조문이 법에 들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끄러운 문장이다. 법조문이 문장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했다.
형법에는 정당방위에 관한 조항이 있다. 제21조다. 이어서 제22조에는 긴급피난에 관한 조항이 나온다. 형법 제22조는 다음과 같다.
정당방위를 모를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긴급피난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당방위가 인정되면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긴급피난도 마찬가지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형법 제22조 제1항에 규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내 집에 불이 났는데 불을 피하기 위해 옆집의 문을 부수고 피신했을 때 옆집의 문을 부순 행위는 긴급피난으로 인정되어 처벌하지 않는다. 또는 옆집에 아기가 자고 있는데 불이 나서 그 아기를 구하기 위해 옆집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아기를 구해냈을 때도 역시 남의 집 문을 부순 나의 행위는 긴급피난으로 인정되어 처벌하지 않는다.
문제는 제22조 제2항이다. “위난을 피하지 못할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하여는 전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가 무슨 뜻인가. 제2항은 ‘위난을 피하지 못할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전항의 규정, 즉 긴급피난으로 인정해 처벌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적용되지 않음을 뜻한다. 문제는 ‘위난을 피하지 못할 책임이 있는 자’라는 표현이다. ‘위난을 피하지 못할 책임’이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되지 않고 읽으면 읽을수록 아리송하게 느껴질 것이다. 제22조 제2항은 이를테면 소방관, 경찰관, 군인 등과 같이 위난을 피하는 대신 위난과 맞서 싸워야 할 사람에게는 긴급피난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이 났는데 소방관이 일반인처럼 위난을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위난을 피할 것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화재 진압에 힘을 써야 한다. 이렇게 직업상 특수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제22조 제2항을 둔 것인데 그 표현인 ‘위난을 피하지 못할 책임이 있는 자’는 아리송한 느낌만 불러일으킬 뿐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위난을 피해서는 안 될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하여는 전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혹은 “위난에 대응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하여는 전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등과 같이 표현할 때 비로소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법조문은 무슨 뜻인지 잘 알기 어렵다면 법조문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형법 제22조 제2항은 알기 쉽도록 다시 써야 한다.
형사소송법은 1954년에 제정된 법률인데 제200조의4는 1995년에 신설되었다. 이때에 다음과 같은 조문이 생겨났다.
여기서 “사법경찰관은 검사에게 신청하여 검사의 청구로 관할지방법원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여야 한다.”라는 표현이 어떤가. ‘청구’라는 말이 두 번 쓰였다. 한 번은 ‘검사의 청구로’에 나오고 또 한 번은 ‘구속영장을 청구하여야 한다’에 나온다. 똑같은 청구인데 한 번은 검사의 ‘청구’이고 다른 한 번은 사법경찰관이 ‘청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구는 누가 하는 것인가. 검사가 청구하는 것인가, 사법경찰관이 청구하는 것인가. 현행법상 구속영장 청구는 검사만 할 수 있지 사법경찰관은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없다. 그러나 위 제200조의4 제1항은 “사법경찰관은 검사에게 신청하여 검사의 청구로 관할지방법원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여야 한다.”라 되어 있어서 사법경찰관이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하는 것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왜 이런 모순을 낳나. 오해와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표현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법경찰관은 검사에게 관할지방법원판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도록 신청하여야 한다.”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마치 사법경찰관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것처럼 되어 있는 현행 형사소송법 제200조의4 제1항은 읽는 이를 어리둥절케 한다. 법조문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