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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오류

틀린 법조문이 버젓이 그대로 있다

by 김세중

민법에 지역권이라는 것이 있다. 내 땅이 있어도 남의 땅을 거쳐야 내 땅으로 갈 수 있다고 하자. 내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의 땅을 통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 내 땅에 가기 위해 남의 땅을 통행할 수 있는 권리가 지역권이다.(내 땅을 요역지, 남의 땅을 승역지라고 한다.) 이때 물론 요역지 소유자와 승역지 소유자 사이에 지역권을 맺는 계약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민법 제292조는 지역권은 요역지 소유권에 부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부종한다는 것은 따라간다는 것이다. 요역지를 남에게 팔면 새로 요역지를 산 사람은 자동적으로 지역권을 갖게 된다는 것이 부종성이다. 또,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위해 요역지에 저당권을 설정했다고 할 때 저당권이 남에게 넘어가면 지역권도 자동적으로 남에게 넘어간다고 민법 제292조는 규정하고 있다.


민법

제292조(부종성)

①지역권은 요역지소유권에 부종하여 이전하며 또는 요역지에 대한 소유권이외의 권리의 목적이 된다. 그러나 다른 약정이 있는 때에는 그 약정에 의한다.


민법 제292조의 뜻은 그러한데 문제는 ‘지역권은 요역지소유권에 부종하여 이전하며 또는 요역지에 대한 소유권이외의 권리의 목적이 된다.’라는 표현이 읽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는 것이다. 제292조 제1항을 보면 ‘이전하며’와 ‘또는’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전하며’와 ‘또는’은 모순이다. ‘이전하며’는 AND이고 ‘또는’은 OR이기 때문이다. 이 조문의 속뜻은 AND이다. ‘또는’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아니, '또는'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는’이 있기 때문에 ‘이게 무슨 뜻이지?’ 하는 의문을 낳는다. 법조문은 명확해야 하고 조금도 의문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민법 제292조 제1항에서 ‘또는’은 오해와 혼란을 불러일으킬 뿐이므로 삭제해야 마땅하다.


민사소송법은 공시최고절차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표를 분실했다 치자. 누가 그 수표를 사용하면 안 되니까 법원에 공시최고를 신청한다. 법원은 이에 신청 내용을 공고한다. 수표에 대한 권리자가 있으면 신고하라는 것이다. 만일 신고자가 없으면 법원은 그 수표에 대해 제권판결한다. 제권판결이란 어떤 증서에 대해 무효를 선고하는 것이다. 그럼 수표를 분실했던 사람은 새로운 수표를 발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수표와 같은 증서를 분실했을 때는 이런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제권판결을 받아야 비로소 잃어버린 증서를 되찾게 된다. 그런데 민사소송법은 제권판결에 대한 불복소송을 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491조는 불복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간에 대한 조항이다.


민사소송법

제491조(소제기기간) ①제490조제2항의 소는 1월 이내에 제기하여야 한다.

②제1항의 기간은 불변기간으로 한다.

③제1항의 기간은 원고가 제권판결이 있다는 것을 안 날부터 계산한다. 다만, 제490조제2항제4호ㆍ제7호 및 제8호의 사유를 들어 소를 제기하는 경우에는 원고가 이러한 사유가 있음을 안 날부터 계산한다.

④이 소는 제권판결이 선고된 날부터 3년이 지나면 제기하지 못한다.


제권판결에 대한 불복소송은 어떤 경우에 할 수 있나? 정당하게 수표를 갖게 된 선량한 제3자가 있다고 할 때 그는 자기가 가진 수표에 제권판결이 내려지면 억울하니까 불복 소송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불복소송을 낼 수 있는 기간에 제한이 있다. 한 달 안에 해야 한다. 그 한 달은 제권판결이 있었음을 안 날부터 한 달 안에 해야 한다고 민사소송법 제491조 제3항이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조문의 표현이 ‘제권판결이 있다는 것을 안 날부터’이다. 제권판결은 이미 일어난 일인데 조문의 표현은 ‘있다는 것을’이다. ‘있다는 것을’은 보통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리킨다. “곧 중요한 회의가 있다는 것을 알고 미리 회의 자료 준비를 했다.” 같은 예문을 보면 ‘있다는 것을’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리킴을 잘 알 수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가리키려면 ‘제권판결이 있다는 것을 안 날부터’와 같이 말해야 한다. ‘었’이 빠졌다. 민사소송법 제491조 제3항에서 ‘제권판결이 있다는 것을 안 날부터’는 ‘제권판결이 있었다는 것을 안 날부터’로 고쳐야 한다. 그래야 뜻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민법 제176조에도 명백한 오류가 있다. 민법 제176조는 다음과 같다.


민법

제176조(압류, 가압류, 가처분과 시효중단) 압류, 가압류 및 가처분은 시효의 이익을 받은 자에 대하여 하지 아니한 때에는 이를 그에게 통지한 후가 아니면 시효중단의 효력이 없다.


법률에 밝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 조문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알고 보면 속뜻은 그리 어렵지 않다. 소멸시효라는 게 있다. 일반적으로 채권은 10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한다. 채권자는 시효가 소멸하지 않도록 채무자나 그 보증인을 상대로 압류, 가압류, 가처분을 할 수 있다. 채무자를 상대로 압류, 가압류, 가처분을 하면 시효는 그 순간 새로 시작된다. 바로 그때부터 10년이 지나야 채권이 소멸한다. 그런데 채권자는 '채무자'가 아니라 '채무자의 보증인'을 상대로도 압류, 가압류, 가처분을 할 수 있다. 민법 제176조는 그럴 경우에 대한 규정이다. 채무자의 보증인을 상대로 압류, 가압류, 가처분을 할 때는 채무자에게 그 사실을 통지해야만 시효중단의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채무자에게 그 사실을 통지하지 않았다면 시효중단의 효력이 없다. 즉 채무자 몰래 채무자의 보증인을 상대로 압류, 가압류, 가처분을 했다면 시효중단 효력이 없기 때문에 채무자는 시효가 지나면 채무를 갚지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민법 제176조는 채무자를 보호하는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시효의 이익을 받 자에 대하여 하지 아니한 때에는’이라는 표현이다. 이미 시효의 이익을 받은 사람은 시효중단의 효력을 말할 필요조차 없다. ‘시효의 이익 받을 자’라고 해야 할 것을 ‘시효의 이익을 받 자’라고 한 것이다. ‘받을’과 ‘받은’은 전혀 의미가 다르다. 민법 제176조의 ‘시효의 이익을 받 자’는 명백한 오류이다.


법은 한 치도 오차 없이 정확해야 하는데 위 조문들은 그렇지 않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표현이 명백히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법조인들은 애초에 조문을 만든 취지를 헤아려서 그 뜻을 이해하겠지만 처음 법조문을 읽는 사람들은 잘못된 표현 때문에 도저히 뜻을 알기 어렵다. 틀린 법조문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법으로서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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