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법 문장의 일대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6법에 자연스럽지 않은 문장이 아주 많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조문이 한둘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문장이었다면 조문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표현이 어색하다 보니 ‘이게 무슨 말이지?’ 하는 의문이 들어 자꾸만 되풀이해 읽기 마련이다. 법조문은 완전해야 한다. 조금도 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법조문이 자연스럽지 않고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법조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6법에 어떤 부자연스러운 조문들이 있는지, 그래서 그것들이 얼마나 독해를 가로막고 있는지 살펴보자.
민법 제279조는 지상권에 대한 규정이다.
지상권은 내 땅이 아닌 곳에 내 건물이나 나무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물론 땅 주인과 지상권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규정한 민법 제279조에 지상권자는 그 ‘토지를 사용하는 권리’가 있다고 씌어 있다. ‘토지를 사용하는 권리’가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는 ‘권리’라는 말을 쓸 때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하든지 ‘토지를 사용할 권리’라고 하지 ‘토지를 사용하는 권리’라고 말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유독 민법 조문에서는 ‘토지를 사용하는 권리’이다. 이 조문을 읽으면서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민법 조문을 처음 만들면서 표현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았다. 그래서 ‘토지를 사용하는 권리’와 같은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표현이 들어가고 말았다. ‘사용하는’과 ‘사용할’은 분명 어감이 다르다. ‘사용할 권리’라야지 ‘사용하는 권리’는 자연스러운 국어 표현이 아니다.
이렇게 ‘권리’를 쓰는 사례는 민법의 다른 조문에서도 나타난다. 민법 제291조와 제302조가 그러하다.
이들 조문의 ‘편익에 이용하는 권리’, ‘수익을 하는 권리’ 역시 ‘편익에 이용할 권리’, ‘수익을 할 권리’라고 해야 문장이 자연스러워지고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법 제397조에는 ‘과실없음을 항변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민법 제397조는 다음과 같다.
법조문에 법률용어가 가득 들어 있어 굉장히 어려운 내용 같지만 실은 복잡한 내용이 아니다. 제2항의 뜻은 채무자가 돈을 빌렸는데 제때에 못 갚았다면 채무자는 자기한테 잘못이 없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실없음을 항변하지 못한다’이다. ‘과실 없다고 항변하지 못한다’였다면 단박에 뜻을 알 수 있지만 ‘과실없음을 항변하지 못한다’라 되어 있어 ‘이게 무슨 뜻이지?’ 하는 의문을 누구나 느끼게 된다. ‘과실없음을 항변하지 못한다’는 다분히 억지스럽다.
상법의 다음 조문들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사원이 될 수 있음을 정한 때에는’에서 ‘사원이 될 수 있음을 정한’은 전혀 국어답지 않다. 국어에서 ‘정하다’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사원이 될 수 있다고 정한’이 ‘정한’을 바로 쓴 것이다. ‘물건을 보관함을 영업으로 하는 자’도 ‘물건을 보관하는 것을 영업으로 하는 자’ 또는 ‘물건 보관을 영업으로 하는 자’라야 의문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형사소송법에는 ‘동행함을 요구할 수 있다’라는 표현이 있다. 형사소송법 제213조 제2항은 다음과 같다.
경찰관은 현행범을 인도 받았을 때에 체포된 사람에 대해 경찰관서에 가자고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인데 ‘경찰관서에 동행함을 요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동행함을 요구할 수 있다’ 같은 말이 국어에 있나? 한국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어색하기 그지없다. ‘동행을 요구할 수 있다’든지 ‘동행하기를 요구할 수 있다’ 또는 ‘동행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여러 자연스러운 표현이 있는데도 하필이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 법조문에 들어 있다.
민법 제506조에는 ‘채무를 면제하는 의사’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제506조는 다음과 같다.
이 조는 만일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을 갚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면 채권은 없어진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채무를 면제하는 의사’는 별로 문제되지 않아 보이고 그래서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니다.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채무를 면제한다는 의사’라고 할 때 비로소 뜻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상법과 형사소송법에는 더욱 어색한 표현이 쓰이고 있다. 다음 조문들을 보자.
상법 제535조의 ‘청산에서 제외될 뜻’은 ‘청산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라 해야 자연스럽다. 형사소송법 제75조 제1항의 ‘영장을 반환하여야 할 취지’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영장을 반환하여야 한다는 취지’라고 했더라면 알기 쉬웠을 것이다. 형사소송법 제125조의 ‘야간집행을 할 수 있는 기재’도 같다. ‘야간집행을 할 수 있다는 기재’라고 할 때 비로소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제외될 뜻’, ‘반환하여야 할 취지’, ‘야간집행을 할 수 있는 기재’는 모두 잘못된 말로서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6법에는 좀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조문도 있다. 민법 제914조는 다음과 같다.
이 조문의 뜻은 미성년자인 자녀는 친권자가 정한 곳에 거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권자는 부모인 경우가 보통이다. 자녀는 부모가 지정한 장소에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반적으로 미성년자는 부모의 보호를 받으면서 부모와 함께 산다. 문제는 위 조문에서 ‘친권자의 지정한 장소’라는 표현이다. ‘친권자의 지정한 장소’는 도무지 국어답지 않다. ‘친권자가 지정한 장소’가 바른 국어 표현이다. 그렇게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친권자의 지정한 장소’는 억지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뒤틀린 표현으로서 한눈에 뜻이 선명하게 파악되어야 할 법조문이 억지스러운 표현 때문에 모호하고 흐릿한 느낌을 준다.
비슷한 문제가 형법에도 있다. 형법 제187조는 다음과 같다.
‘사람의 현존하는 기차’라는 표현이 있다. ‘사람이 타고 있는 기차’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타고 있는 기차’라고 하면 된다. ‘사람의 현존하는 기차’라고 해야 할 까닭이 조금도 없다. ‘현존하는’을 그대로 두어 ‘사람이 현존하는 기차’라고 해도 되지만 ‘사람의 현존하는 기차’는 최악이다.
‘친권자의 지정한 장소’, ‘사람의 현존하는 기차’보다 더 이상한 표현도 있다. 상법 제304조는 다음과 같다.
여기에 ‘그 자로부터 회사에 통지한 주소’가 의아함을 자아낸다. 회사에 누가 주소를 통지했다는 말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자가 회사에 통지한 주소’라고 써야 할 것을 ‘그 자로부터 회사에 통지한 주소’라 잘못 썼다. 혹은 ‘그 자로부터 회사에 통지된 주소’나 ‘그 자로부터 회사가 통지받은 주소’라고 해도 된다. 그 어느 것도 아닌 ‘그 자로부터 회사에 통지한 주소’는 최악이다.
상법에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조문이 또 있다. 제222조는 다음과 같다.
이 조는 합명회사에서 사원이 퇴사할 경우에 대한 규정이다. 합명회사의 사원이 출자를 금전이 아니라 노무 또는 신용의 형태로 했을 때도 퇴사할 때 역시 그 노무, 신용의 지분을 금전으로 환급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법조문의 표현은 ‘노무 또는 신용으로 출자의 목적으로 한 경우에도’이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파악알 수 없다. 표현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노무 또는 신용을 출자의 목적으로 한 경우에도’라고 할 때 뜻이 단번에 파악된다. 일상적으로는 ‘노무 또는 신용을 출자한 경우에도’라고 보통 말하고 그래야 가장 알기 쉽다.
상속 중에 한정승인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한정승인에 관한 민법 제1034조에도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현이 들어 있다. 제1034조 제1항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상속재산으로서’라는 말이 잘못 쓰였다. ‘으로서’가 쓰일 자리가 아니었다. ‘상속재산으로써’라고 해야 일단 말이 되고 그보다 ‘상속재산에서’가 더 좋다. 또 ‘상속재산을 가지고’라고 해도 된다. ‘상속재산으로서’는 이도 저도 아닌 최악의 표현이다. 말이 안 되는 표현이 쓰인 바람에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민법에는 비교적 짤막한 조문인데도 문장이 자연스럽지 않아 어색한 느낌을 주는 조문이 있다. 다음 민법 제31조가 그렇다.
법인은 만들고 싶다고 누구나 마음대로 만들 수 없고 반드시 법률의 규정에 따라서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법률의 규정에 의함이 아니면’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법률의 규정에 의하지 않으면’이라고 해야 할 것을 문장을 잘못 썼다. 둘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자연스러운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의함이 아니면’과 ‘의하지 않으면’은 분명히 다르다. ‘의하지 않으면’이 자연스럽고 ‘의함이 아니면’은 잘못된 표현이다.
민법에서 ‘아니면’을 쓸 자리가 아닌데 ‘아니면’을 쓴 조문은 또 있다. 민법 제337조가 그런 경우다.
‘채무자가 이를 승낙하지 않으면’이었다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데 ‘채무자가 이를 승낙함이 아니면’이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민법 제708조의 ‘아니면’도 역시 마찬가지로 잘못 사용되었다.
누구든 ‘다른 조합원의 일치가 아니면 해임하지 못한다’를 어색하다고 느낄 것이다. ‘다른 조합원이 일치하지 않으면’과 비교하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민법 제708조는 업무집행자인 조합원을 해임하려면 다른 조합원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뜻이 좀 더 쉽게 드러나도록 표현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다른 조합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도 좋은 대안이다.
법조문은 명료하고 명확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어 문장으로서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래서 읽는 데 거부감이 들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민법, 상법 등 우리나라 기본법에는 자연스럽지 않고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주는 문장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법조문을 읽는 사람의 이해를 방해한다. 법조인들은 법학을 공부하면서 조문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배우기에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일반 국민은 법조문을 읽어도 이상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표현 때문에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마치 국민들이 법조문을 이해하지 못하게끔 장막을 친 듯한 느낌마저 준다. 투명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래서는 안 된다. 법이 있기에 국가와 사회가 유지된다. 그런데 그 법조문이 자연스럽지 못한 표현 때문에 투명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의 법에 대한 이해가 지체되고 그로 인해 사회적 낭비가 생겨서야 되겠는가. 6법 문장의 일대 정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국민이 법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그래야만 법이 잘 지켜질 수 있고 분쟁을 줄여 사회가 평온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