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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법조문 번역 오류

일본 법을 참고하더라도 번역만큼은 바로 했어야

by 김세중

민법은 수많은 법률 가운데서도 가장 기본적인 법률이다. 조문이 자그마치 1118조까지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리는 기본적인 권리와 지켜야 할 의무가 민법에 들어 있다. 그리고 민법에서 으뜸가는 원리가 민법 제2조에 제시되어 있다. 그 제1항은 다음과 같다.


민법

제2조(신의성실) ①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제2조는 법조인이 되기 위해 민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처음 마주치는 조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장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문제가 없지만 ‘신의에 좇아’가 뭔가 이상하지 않나. ‘신의에 좇아’가 무슨 뜻인가. 누구나 ‘신의’라는 말은 많이 들어서 알겠지만 ‘신의에 좇아’라니!


‘좇다’라는 말은 사실 일상생활에서 그리 널리 쓰이는 말은 아니다. ‘좇다’보다는 ‘따르다’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그러나 ‘좇다’를 쓸 경우에는 ‘명예를 좇다’, ‘권력을 좇다’, ‘의견을 좇다’, ‘말씀을 좇다’, ‘학설을 좇다’처럼 ‘~을 좇다’, ‘~를 좇다’라고 한다. ‘명예에 좇다’, ‘권력에 좇다’, ‘의견에 좇다’, ‘말씀에 좇다’, ‘학설에 좇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좇다’는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말이고 목적어에는 조사 ‘을’, ‘를’이 붙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국어문법이다. 그런데 민법 제2조 제1항에 ‘신의에 좇아’가 들어 있다. 당연히 ‘신의를 좇아’여야 한다. ‘신의에 좇아’는 국어문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진다. 법조인들은 자꾸 읽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져서 이상한 줄을 잘 모르겠지만 ‘신의에 좇아’는 말이 안 되는 표현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말이 안 되는 ‘신의에 좇아’가 민법 제2조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답은 일본 민법에 있다.


일본 민법의 해당 표현은 다음과 같다.


権利の行使及び義務の履行は、信義に従い誠実に行わなければならない。


일본 민법 조문과 우리나라 민법 조문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信義に従い’가 ‘신의에 좇아’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信義に’에서 일본어 조사 ‘に’는 ‘에’니까 ‘신의에’로 옮겼고 ‘従い’에서 ‘從’은 ‘좇을 종’이니 ‘좇아’로 옮긴 것이다.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옮겼다. ‘신의에 좇아’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최소한 ‘신의를 좇아’라고 했어야 했다. 한걸음 나아가 ‘신의를 좇아’보다 ‘신의를 지켜’라고 했더라면 가장 알기 쉽고 한국어다웠을 것이다.


요컨대 ‘신의에 좇아’는 어이없는 오역이었다. 법률가들에게는 ‘신의’가 중요했을 뿐 ‘좇아’든 ‘지켜’든 동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더욱이 ‘신의에’든 ‘신의를’이든 조사는 더더욱 중요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신의에 좇아’라는 괴상하고 희한한 표현이 민법의 가장 중요한 조문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대로이다. ‘신의를 지켜’로 하루바삐 고쳐야 한다. 그래야 국어문법에 맞고 우리말답다. 그리고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에 좇아’는 민법 제2조 제1항 ‘신의에 좇아’에만 나오지 않는다. 민법 제39조, 민법 제203조 및 민법 제303조에도 나오는데 각각 ‘조건에 좇아’, ‘선택에 좇아’, ‘용도에 좇아’, ‘내용에 좇은’ 등과 같이 나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에 좇아’는 국어문법에 맞지 않는다. ‘~을 좇아’여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좇아’를 쓸 필요도 없다. ‘조건에 따라’, ‘선택에 따라’, ‘용도에 따라’, ‘내용에 따른’이라고 하면 더없이 알기 쉽다. 그게 바로 일반 국민의 언어 사용이다. ‘~에 좇아’, ‘~에 좇은’은 일본어를 기계적으로 번역한 결과로 하루빨리 법조문에서 들어내야 한다. 부끄러운 일본어 찌꺼기가 아닐 수 없다.


‘좇다’뿐이 아니다. 6법에는 ‘위반하다’라는 말이 참 많이 쓰이고 있다. ‘위반하다’라는 말은 민법에만 수십 번 나타난다. 그런데 민법에서 ‘위반하다’는 대부분 ‘~에 위반하다’ 꼴로 쓰이고 있다. 한 예로 민법 제5조 제2항은 다음과 같다.


민법

제5조② 전항의 규정에 위반한 행위는 취소할 수 있다.


‘전항의 규정에 위반한 행위’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위반하다’라는 말은 ‘법률을 위반하다’, ‘교통법규를 위반하다’, ‘약속을 위반하다’ 등에서 보는 것처럼 목적어를 필요로 하고 목적어에는 조사 ‘을’ 또는 ‘를’이 붙는다. 이것은 국어의 문법규칙이다. 그렇다면 ‘전항의 규정을 위반한 행위’여야 하는데 ‘전항의 규정에 위반한 행위’라 돼 있다. 민법 제5조 제2항은 국어문법을 어긴 문장이다.


그럼 어떻게 해서 국어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 우리나라 법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앞에서 본 ‘~에 좇아’와 마찬가지로 일본 민법을 잘못 번역했기 때문이다. 민법 제5조 제2항에 해당하는 일본 민법의 조문은 다음과 같다.


第五条 

2 前項の規定に反する法律行為は、取り消すことができる。


일본 민법의 ‘規定に反する’을 ‘규정에 위반한’이라고 했다. 일본어의 ‘に’를 ‘에’로 옮기고 ‘反する’를 ‘위반한’이라고 했다. 일본 법조문에 ‘反する’이니 우리 민법에서도 그대로 ‘반한’이라고 했더라면 문제가 없었다. ‘전항의 규정에 반한 행위’는 국어에서도 문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한’ 앞에 ‘위’를 넣어 ‘위반한’으로 바꾼 이상 ‘전항의 규정을 위반한’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전항의 규정에 위반한 행위’라는 국어문법에 어긋나는 이상한 표현이 법조문에 들어오게 되었다.


민법 제5조 제2항과 같이 ‘~에 위반하다’라는 말은 민법뿐 아니라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에도 곳곳에 보이고 있다. 그 예를 일부 보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이 모든 예는 일본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 ‘위반하다’를 쓴 이상 ‘~을/를 위반하다’라고 해야 하는데 일본어 조사 ‘に’를 ‘에’로 옮겨 ‘~에 위반하다’라고 한 것이다.

민법

제38조(법인의 설립허가의 취소) 법인이 목적 이외의 사업을 하거나 설립허가의 조건에 위반하거나 기타 공익을 해하는 행위를 한 때에는 주무관청은 그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형법

제112조(중립명령위반) 외국간의 교전에 있어서 중립에 관한 명령에 위반한 자는 3년 이하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상법

제176조(회사의 해산명령) ①

(전략)

3. 이사 또는 회사의 업무를 집행하는 사원이 법령 또는 정관에 위반하여 회사의 존속을 허용할 수 없는 행위를 한 때


형사소송법

제441조(비상상고이유) 검찰총장은 판결이 확정한 후 그 사건의 심판이 법령에 위반한 것을 발견한 때에는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할 수 있다.


‘법률을 위반하다’, ‘교통법규를 위반하다’, ‘약속을 위반하다’, ‘규칙을 위반하다’, ‘규정을 위반하다’ 등에서처럼 ‘위반하다’는 으레 ‘~을/를 위반하다’로 알았던 사람들은 6법 조문을 읽으면서 숱한 ‘~에 위반하다’를 접하고 당혹하게 된다. 왜 법조문에서만 이럴까 하고 의문을 느낀다. 기성 법조인들은 이런 법조문에 워낙 익숙해져서 이상한 줄조차 잘 모르겠지만 처음 법학의 길에 들어선 젊은이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에 6법을 만들면서 법조문을 잘못 만들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왜곡된 문장이 우리나라 법조문에 들어왔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도록 그대로 남아 있다.


‘위반하다’뿐이 아니다. ‘위배하다’라는 말도 법에 들어 있다. 형법 제355조는 횡령과 배임에 관한 죄를 규정한다. 제1항이 횡령죄이고 제2항이 배임죄이다. 제2항은 다음과 같다.


형법

제355조(횡령, 배임)

①(생략)

②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도 전항의 형과 같다.


‘그 임무에 위배한 행위로써’라는 표현이 있다. ‘위배하다’는 ‘위반하다’와 마찬가지로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동사이고 목적어에는 조사 ‘을/를’이 붙어야 한다. 따라서 ‘그 임무를 위배하는 행위로써’라고 해야 문법에 맞다. 그런데 ‘그 임무에 위배한’이라고 잘못 썼다. 이 역시 일본어의 ‘背く’라는 동사는 ‘~に背く’로 쓰이는 것에 영향을 받은 탓이다. 일본 형법의 배임죄 조문에는 ‘任務に背く行為’라 돼 있는데 ‘배하는’ 앞에 ‘위’를 넣어 ‘위배하는’이라고 했다. 국어에 ‘배(背)하다’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국어에 있는 ‘위배하다’라는 말을 썼겠지만 ‘위배하다’를 쓴 이상 ‘그 임무를 위배하는 행위’라고 하든지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해야 국어문법에 맞다.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는 이도 저도 아닌 틀린 말이다. 형법에서 배임죄를 폐지하기로 했으니 형법 제355조 제2항이 없어지면 이 문제가 해소되기는 한다. 그러나 같은 표현이 상법에도 있다.


상법

제622조(발기인, 이사 기타의 임원등의 특별배임죄)

①회사의 발기인, 업무집행사원, 이사, 집행임원, 감사위원회 위원, 감사 또는 제386조제2항, 제407조제1항, 제415조 또는 제567조의 직무대행자, 지배인 기타 회사영업에 관한 어느 종류 또는 특정한 사항의 위임을 받은 사용인이 그 임무에 위배한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회사에 손해를 가한 때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상법 제662조 제1항의 ‘그 임무에 위배한 행위로써’ 역시 문법에 맞지 않다. ‘그 임무를 위배한 행위로써’든지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로써’라고 해야 한다.


일본어를 잘못 번역해서 이상한 문장이 되어 버린 법조문은 이밖에도 많다. 다음 형사소송법 조문을 보자.


형사소송법

제249조(공소시효의 기간)

① 공소시효는 다음 기간의 경과로 완성한다.


공소시효라는 말은 법률용어긴 하지만 법조인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사람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범죄를 저질러도 그 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나면 처벌받지 않는다. 범죄에 따라 공소시효의 기간이 다르다. 중범죄일수록 공소시효의 기간이 길다. 가벼운 죄일수록 공소시효의 기간은 짧다. 형사소송법 제249조 제1항에 “공소시효는 다음 기간의 경과로 완성한다.”라 돼 있다.


이 조문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다. 공소시효는 다음 기간의 경과로 완성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완성한다는 말인가. 목적어가 없다. ‘완성한다’는 ‘작품을 완성하다’, ‘설계도를 완성하다’, ‘건물을 완성하다’ 등에서처럼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동사다. 목적어 없는 ‘완성하다’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완성했어.”라고 말한다면 누구든 대뜸 “뭘 완성했어?” 하고 묻기 마련이다.


‘완성하다’는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동사이다. 그러나 “공소시효는 다음 기간의 경과로 완성한다.”에는 목적어가 없다. 생략된 말도 없다. “공소시효는 다음 기간의 경과로 완성된다.”라고 해야 할 것을 잘못 썼을 뿐이다. 왜 이렇게 잘못된 문장이 법조문에 쓰이게 되었을까. 이 역시 일본 법조문을 잘못 번역한 탓이다. 해당 일본 법조문은 다음과 같다.


第250条

時効は (중략)、次に掲げる期間を経過することによつて完成する


일본 법조문에는 ‘完成する’라 돼 있다. 그리고 일본어의 ‘する’(스루)는 보통 ‘하다’이다. 그래서 ‘完成する’를 ‘완성한다’로 옮겼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어의 ‘完成する’는 목적어가 있을 때에는 ‘완성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맞지만 목적어가 없을 때에는 ‘완성되다’로 번역해야 한다. ‘する’는 곧 ‘하다’라는 선입견 때문에 ‘완성된다’라고 해야 할 것을 ‘완성한다’라고 했다.


같은 문제는 민법에도 숱하게 나타난다. 민법 제147조를 보자.


민법

제147조(조건성취의 효과) ①정지조건있는 법률행위는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 그 효력이 생긴다.


‘정지조건’, ‘법률행위’ 같은 법률용어가 들어 있어 이 조문이 무슨 뜻인지 일반 국민은 좀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조문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조건이 무엇을 성취한다는 말인가. ‘성취한’이라는 말은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말인데 목적어가 없다. 표현이 무언가 잘못되었다. ‘조건이 성취된 때로부터’라고 해야 할 것을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라고 잘못 쓴 것이다. 이 조문의 뜻은 실은 복잡하지 않다. 조건이 딸린 법률행위는 조건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효력이 생긴다는 뜻이다. 일테면 A가 B에게 ““B야, 네가 시험에 합격하면 노트북을 줄게.”라고 했다면 B가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A가 B에게 노트북을 줄 의무가 생기지 않는다. B가 시험에 합격할 때 비로소 노트북을 B에게 줄 의무가 생기고 B는 A로부터 노트북을 받을 권리가 생긴다. 아주 당연한 것이다. 이 단순한 이치가 어려운 법률용어가 사용되어 “정지조건 있는 법률행위는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 그 효력이 생긴다.”라 표현되어 있는데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는 어이없는 잘못된 말이다. ‘조건이 성취된 때로부터’라야 한다.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 역시 일본 민법 조문의 ‘条件が成就した時から’를 오역한 것이다.


민법 제142조는 어떤가.


민법

제142조(취소의 상대방) 취소할 수 있는 법률행위의 상대방이 확정한 경우에는 그 취소는 그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 하여야 한다.


법조인이 아니면 좀체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조문인데 사실 속뜻은 간단하다. 어떤 법률행위를 취소하려면 법률행위의 상대방이 있는 경우 상대방 본인에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아닌 제3자에게 취소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문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상대방이 확정한 경우에는’ 때문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확정했다는 말인가. ‘상대방이 확정된 경우에는’이라 해야 하는데 ‘상대방이 확정한 경우에는’이라 되어 있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역시 일본 민법의 ‘相手方が確定している場合’를 오역했다.

같은 오류가 형사소송법에도 있다. 형사소송법 제441조는 다음과 같다.


형사소송법

제441조(비상상고이유) 검찰총장은 판결이 확정한 후 그 사건의 심판이 법령에 위반한 것을 발견한 때에는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할 수 있다.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비상상고를 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한 규정인데 ‘판결이 확정한 후’가 이상하지 않은가. 판결이 무엇을 확정한다는 말인가. ‘판결이 확정한 후’는 일본 형사소송법의 ‘判決が確定した後’를 기계적으로 번역한 것으로 오역이다. 우리말로는 ‘판결이 확정된 후’라야 한다.


민법에서 상속에 관한 조문 중에 ‘상속이 개시한 때로부터’라는 표현이 든 조문이 있다. 제1117조다.


민법

제1117조(소멸시효) 반환의 청구권은 유류분권리자가 상속의 개시와 반환하여야 할 증여 또는 유증을 한 사실을 안 때로부터 1년내에 하지 아니하면 시효에 의하여 소멸한다. 상속이 개시한 때로부터 10년을 경과한 때도 같다.


우리는 “상속이 개시되었다.”라고 하지 “상속이 개시했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상속이 개시했다.”는 누구라도 이상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민법 제1117조에는 ‘상속이 개시한 때로부터’라는 말이 들어 있다. ‘상속이 개시된 때로부터’라고 하면 편하게 이해되는데 ‘상속이 개시한 때로부터’라 돼 있어 의아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개시된’이라 해야 하는데 ‘개시한’이라 한 것이다.


같은 문제가 제998조에도 있다. 제998조는 다음과 같다.


제998조(상속개시의 장소) 상속은 피상속인의 주소지에서 개시한다.


이 조의 뜻은 상속은 피상속인 즉 사망한 사람의 주소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사망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살던 주소지를 기준으로 상속 절차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상속은 피상속인의 주소지에서 개시한다.”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개시하다’는 앞에서 본 ‘완성하다’, ‘성취하다’, ‘확정하다’처럼 타동사이다. 타동사는 목적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상속은 피상속인의 주소지에서 개시한다.”에서 ‘상속은’은 주어다. 목적어가 아니다. 따라서 “상속은 피상속인의 주소지에서 개시된다.”라고 해야 맞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바로 위 제997조에서는 ‘개시된다’라고 바르게 썼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다.


민법

제997조(상속개시의 원인) 상속은 사망으로 인하여 개시된다.


제997조에서는 “상속은 사망으로 인하여 개시된다.”라고 바로 썼다. 왜 다음 제998조에서는 ‘개시된다’라 하지 않고 ‘개시한다’라 했나.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다. 제998조에서도 ‘개시된다’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된다’라고 해야 하는데 ‘~한다’라고 잘못 쓴 조문은 그 밖에도 많다. 민법 제193조도 그런 예다.


민법

제193조(상속으로 인한 점유권의 이전) 점유권은 상속인에 이전한다.


여기서도 “점유권은 상속인에 이전된다.”라고 해야 맞고 뜻이 쉽게 이해된다. 민법 제94조에는 ‘청산이 종결한 때에는’이 있는데 이 역시 ‘청산이 종결된 때에는’이라야 한다.


민법

제94조(청산종결의 등기와 신고) 청산이 종결한 때에는 청산인은 3주간내에 이를 등기하고 주무관청에 신고하여야 한다.


민법 제102조 제1항은 다음과 같다.


민법

제102조(과실의 취득)

천연과실은 그 원물로부터 분리하는 때에 이를 수취할 권리자에게 속한다.


이 민법 조문은 소가 송아지를 낳았을 때,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땅에 떨여졌을 때 같은 경우 소에서 나온 송아지, 떨어진 사과가 누구의 것이냐를 규정한 조문이다. 이런 경우 ‘이를 수취할 권리자’에게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그 원물로부터 분리하는 때에’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 때문에 금방 조문의 뜻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 원물로부터 분리되는 때에’였더라면 쉽게 이해되는데도 말이다. 이 조문에서 ‘분리하는’은 잘못 쓰였다. ‘분리되는’이라야 한다. 이 역시 일본 민법 조문의 ‘元物から分離する時に’를 잘못 번역한 결과이다. ‘分離する’를 ‘분리하는’으로 옮겼지만 목적어가 없을 때는 ‘분리되는’으로 번역해야 바르다.


상법에도 같은 문제가 곳곳에 있다.


상법

제476조(납입) ①사채의 모집이 완료한 때에는 이사는 지체없이 인수인에 대하여 각 사채의 전액 또는 제1회의 납입을 시켜야 한다.


제478조(채권의 발행) ①채권은 사채전액의 납입이 완료한 후가 아니면 이를 발행하지 못한다.


제476조에서 ‘사채의 모집이 완료한 때에는’이라 했는데 ‘사채의 모집’이 무엇을 완료했다는 말인가. ‘사채의 모집이 완료된 때에는’이라야 한다. ‘사채의 모집을 완료한 때에는’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제478조에서는 ‘사채전액의 납입이 완료한 후가’라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사채전액의 납입이 완료된 후가’든지 ‘사채전액의 납입을 완료한 후가’라야 한다.


민법, 형법, 상법, 형사소송법에 ‘~되다’라 써야 하는 곳에 ‘~하다’라고 쓴 조문은 일본 법조문을 우리말로 잘못 옮긴 사례들이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어렵게 느껴지는 법조문이 더욱더 어렵게 느껴진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법조인들도 처음 법을 공부하면서 이런 이상한 문장에 의아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익숙해지면서 나중에는 이상한 줄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 법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학생들이나 어쩌다 법조문을 들여다보게 되는 일반인들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문장이 문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일본 법을 참고해 법을 만들면서 세심하지 못했다. 번역을 잘못했다. 법조인들은 법리만 중요했을 뿐 그 문장이 바른 한국어인지는 세심하게 살피지 않았다. 그때는 그랬다 하더라도 그 후 고치고 바로잡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채 지난 세월 살아왔고 지금까지도 그대로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안 된다. 일본어 오역으로 이상한 문장이 돼 버린 법조문은 국민의 법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국민의 권리가 가로막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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