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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안 Sep 28. 2020

어느 와식 생활자의 침대 예찬

#01. 내가 사랑하는 공간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게 흘러가는 무채색의 나날이 이어졌다.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주말만이 삶의 이유인 것처럼 느껴졌다. 안정과 지루함은 너무 가까이 붙어있어서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삶이 다채롭고 충만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취향과 근거가 세밀하고 분명했다. 평평한 종이 같은 일상은 취향에 맞춰 하나하나 접어가야 입체적으로 변해가나 보다. 그래,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 




1. 

이랜드 청년 주택 청약을 신청했었다. 보증금 약 4천에 월세 20, 셰어형으로 들어가면 약 5평 정도가 될 나의 독방. 새로운 집에서 시작할 나의 새 일상은 하루 짜리 달콤한 꿈으로 끝이 났다. 일부러 경쟁률이 낮을 줄 알고 친구와 셰어형으로 신청한 거였는데 서류심사 대상도 되지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집 구하는 사람이 많구나. 


2.

살고 있는 집의 계약 만료 기간이 다가오며 자연스럽게 공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먼 훗날 투룸 전세 오피스텔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집은 원룸 정도여서, 그냥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행복해지면 그만인 먼 이야기였다. 정신 차려보니 돈과 의지만 있다면 정말 투룸 오피스텔을 찾아 이사해도 되는 사회인이 되어있었다. 아직은 그냥 꿈만 꾸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을 뿐인데.


3.

학교 앞 작은 원룸에서 지낸지도 2년이 다 되어 간다. 미니멀리즘에 딱히 뜻이 없어 그득그득 물건을 들여놨더니 방이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 가끔 물품 보관 창고에 내가 얹혀 자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와중에도 내가 방에서 특히 좋아하는 공간이 있기 마련이다.


내 방에서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침대다. 휴식이 보장되는 구역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책상 앞에서는 일을 해야 하고, 싱크대 앞에서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 책장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닥에 눌러앉아 멍하니 지금까지 모아둔 MD를 구경하거나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등을 멍하니 바라보는 게 전부라 애초에 활동 영역이 아니기도 했다. 즉, 휴식은 침대에서.


전기장판을 틀고 극세사 이불을 턱끝까지 올린 채 웅크렸을 때의 감각을 좋아한다. 내 몸만 한 바디 필로우를 다리 사이에 끼고 모로 누웠을 때 느껴지는 안정감을 좋아한다. 누워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무방비한 편안함을 좋아한다. 매트리스 위에서 어떠한 부담 없이 오롯이 내가 되는 순간이 좋다.


궁극의 와식생활을 위해 대형 삼각 쿠션을 사고 침대 옆에 아이패드 거치대를 설치했다. 삼각 쿠션에 늘어지듯 몸을 기대고, 아이패드를 올려다보며 누운 채 블루투스 키보드로 글을 썼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감상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멘트는 두 가지. "언니 지금 진짜 게을러 보인다." "사람이 얼마나 게을러지고 싶어 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세팅."


사실 침대에서 쉬기만 하지는 않는다. 빨래도 침대에서 개고, 재택근무를 할 적에는 침대 위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책도 침대에서 읽고, 공부도 침대에서 했고,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밥도 침대에서 먹을 때가 있었다. 


휴식 공간은 휴식 공간으로 남겨놔야 하지만 오히려 침대가 휴식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거기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각 잡고 무언가 '일'이라고 불릴 만한 행동을 해야 하는 환경에 놓인다면 지레 겁을 먹곤 했다. 투두 리스트 앞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에게 사탕 쥐어주고 병원으로 꼬셔내듯 나를 달래야 했다. 그나마 침대가 제일 편하니까, 여기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어쩌면 나한테 침대는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물리적인 휴식 공간이기도 하면서, 심리적으로 나를 풀어주면서 무언가 시도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곳. 

 

4.

이렇게 와식 생활자로 살아갈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적어도 새로운 휴식공간이 생기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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