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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희 Apr 17. 2024

'살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vivre

Où je vis 내가 사는 곳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프랑스어로 '살다'라는 뜻의 동사는 통상 두 가지가 있는데 Habiter와 Vivre이다.

둘의 정확한 차이는 나도 구글링을 통해 알게 됐는데 우선,


Habiter [아비떼]는 내가 사는 곳 : 살기, 거주하기와 동등하며, 사람이 사는 곳을 강조하는 반면

Vivre [비브흐]는 불규칙 동사로 사람이 언제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표현한다. "존재한다", "살아있다", "특정한 생활 방식을 가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히 Vivre는 문장 안에서 쓰일 때 특정 기간이 뒤에 따라오기도 하고 그 장소에서 하는 활동들, 그 장소에 지닌 애착, 감상 등을 함께 쓰기에 적절하다.


앞으로의 글은 내가 그곳에 '있었던' '살았던' 이야기이기에 내가 자연스레 vivre 단어를 떠올린 것 같다.





흙을 창작 작업의 재료로 삼고 작업해 온 지 4년이 넘어간다. 흙 작업 1년 차에 러프하고 엉뚱한 내 작업을 귀엽게 봐주신 갤러리 대표님의 제안으로 감사하게 전시도 했고 오롯이 나의 즐거움만을 위해서 한 작업들을 놀랍게도 여러 사람이 소장했다. 20점 넘게 팔렸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 당시 도자기 선생님 공방에 가서 의자에 앉으면 5분도 안 돼서 손이 움직였다. 매번 만들 게 바로바로 떠올랐고 시간이 부족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4년 차인 최근엔 내 공방을 차렸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수업을 맡아서 하지만 막상 내 작업은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젠 그때그때 생각나는 걸 만들기보단 시리즈 개념의 조금 더 진지한, 발전이 있는 작업 형태로 넘어가야 할 때인데 한 차례 고비이자 쉼의 시간이 찾아온 거다.


이렇게 작업을 안 해도 되나 위기감도 느껴지고 뭘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니 큰일인데? 설마 내가 흙 자체에 더 이상 흥미를 잃은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란 막막함도 있었다. 그런데 이 위기의 타파는 의외의 지점에서 그 실마리가 풀렸다.




프랑스에서 20대를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서 구태여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나는 다시 돌아온 이곳에 어떻게든 발 붙여 적응하려,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의 태도로 살아온 듯하다. 돌아갈 수 없고, 그러니 그리워하지도 말고, 이제 내가 비빌 언덕은 오직 이곳이야 하는 강박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것 같다. 돌아보니 그러하다. 프랑스에서 막 자리 잡을 무렵 그런 결정을 내리고 돌아와서 조금 더 무거운 마음이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어쩌다 가끔,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도시인 낭뜨의 익숙한 거리를 걷는 꿈을 꾸기라도 하면 돌아갈 수 없다는 엄청난 슬픔, 모든 거리와 상점은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어도 내가 살던 낭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감에 매번 엉엉 울다 깼을 정도다.


20대를 프랑스에서 함께 보낸 친구들과 그 당시를 회상하면 내가 가져간 유일한 무선 국제전화를 기숙사에서 연결해 모두가 돌아가며 집에 전화를 걸었던 마지막 세대이고, 흔히들 그렇듯 우리가 머물던 그때가 참 호시절이었지. 한다. 그때 호기롭게 무역업도 꿈꿔보고, 한국인 여행객들 대상으로 가이드도 하고, 유튜버라는 직업이 이렇게 만연하지 않았을 때인지라, 나는 사막을 건너고 바다를 건넌 모든 경험을 카메라를 거쳐서가 아닌 내 몸으로 직접 겪어냈다. 그런 면에선 정말 가치 있고 귀한 경험들이 내 몸 곳곳에 새겨졌다 여긴다.


예술가로서 어떻게 그 흔적들, 기억들을 좀 더 세상에 꺼내놓고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을까?

좀 더 용기를 내서 세상과 소통해보고 싶다. 작업을 통해서!


이 수요연재가 작업을 지속함에 있어 크고 작은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 첫 발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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