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리가 만난 지구인 16 _ 초등학교 교사 정지은.
전라도와 부산의 어디쯤, 어중간한 사투리. 뭐든 열심히 부지런히 하는 인내심. 그녀는 ‘시골’에서 왔다. 지역이면 다 시골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고향은 흥부골이다. 부모님이 밤낮으로 농사일에 매달리는 걸 보고 자랐고,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올 즈음엔 저녁밥을 지어놓고 기다리는 기특한 둘째딸이었다. 남원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온 그녀는 마침내 꿈꾸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부산 남자와 결혼하고 예쁜 아이도 낳았다.
Q . 고향이 어디세요?
A . 전라북도 남원, 흥부골이에요. 하루에 버스가 네 대 다니고요, 흥부골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어요. 학교로 바로 가는 버스가 없어서 늘 한 시간 정도 걸어서 등교했어요. 면에서도 제일 산골이에요. 마을 단위에 슈퍼도 없어요. 5일 장에 열리면 가서 필요한 걸 샀어요. 3남매인데, 한 달에 한 번씩 아버지가 장에 가서 라면이나 과자를 한 박스씩 사오시면 그걸 한 달 동안 먹었어요. 장에 있는 슈퍼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 PC방 하시는 줄 알았대요. 라면을 한 박스 씩 사 가서. 한번은 너무 맛없는 과자를 한 박스 사오셔서, 아직도 그 과자가 고향집 창고에 그대로 있어요(웃음).
Q . 언제 도시로 나오게 됐어요?
A . 전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자취를 시작했어요. 전주가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닌데, 나한테는 어마어마하게 컸어요. 흥부골에선 한 학년이 10명이었거든요. 한 반이 아니라 한 학년을 다 합쳐서. 초등학교 6년 다 그 10명이 그대로 한 학년씩 올라가는 거예요. IMF때 한 친구네 집이 축산이 잘 안 되서 전학가고, 9명이 졸업했어요. 중학교 때는 초등학교 두 개가 합쳐졌는데, 그래도 한반, 20명이었어요.
그런데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니까, 한 학년이 10반 인거에요. 한반이 32명. 그게 10반이나 있어요. 한반 애들도 다 모를 지경이었어요. 학교 전체도 마찬가지고. 공부도 잘 하는 편이었는데, 전주 오자마자 중하위권으로 떨어졌어요. 도로도 너무 컸어요. 6차선이라니. 고향에선 늘 2차선 도로에 차 한두 대 정도 다녔거든요.
흥부골에서 전주로 간다는 건 큰 결심이어서 중학교 선배들은 전주 까지 공부하러 나오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남원에도 인문계 학교가 있으니까 다들 거기 갔죠. 근데 우리 학년부터 공부에 열정 있는 애들이 많아서 6명이 같이 전주로 왔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부산교대에 입학했죠.
Q . 전주에서 부산교대 까지 올 생각은 또 어떻게 했어요?
A . 교대에 가고 싶었고, 집에서도 제가 선생님이 되길 바랐어요. 교대 지원하는 학생들은 좀 특성이 있는데, 교대로 진로를 정하면 지역은 사실 상관없어요. 서울 학생들이 부산교대에도 많이 와요. 교대는 전국에 흩어져 있으니까 지역 상관없이 진학해요. 거기다 고모 두 분이 일찍 부산으로 일하러 오셔서 부산 남자랑 결혼해서 살고 계셨거든요. 사촌 언니도 부산 교대에 갔고요. 부산이 그렇게 낯선 도시는 아니었어요.
Q . 부산에 처음 왔을 때 어땠어요?
A . 전주에 처음 갔을 때 충격이 너무 커서 부산에서는 덜했는데, 지하철이라는 교통 수단이 색달랐죠. 어디서 타고 어디로 가야한다는 설명 해주시는 분이 없으니까, 내가 맞게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어요. 부산교대도 교정이 작고 학생 수도 적은 편이어서 진학 초기엔 부산이 그렇게 크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러다 부산대에 갔는데 (웃음) 사람이 물결치듯이 다니는 걸 봤죠. 사람이 그렇게 많을 수가.
Q . 특별한 곳에서 왔기 때문에, 학교 안의 다른 학생들과 차이를 느꼈어요?
A . 차이는 있었어요. 어릴 때 치킨이나 피자 같은 거 잘 못 먹어 봤으니까 친구들이 뭐 먹으러 가자하면 무조건 치킨 치킨 그랬거든요. 친구들이 놀렸어요. 흥부마을에서 왔다고. 그냥 장난이어서 상처 받지는 않았어요. 그런 거 실컷 먹고 자란 친구들의 10대 시절을 상상해보긴 했어요. 우리 집이 뭐가 부족했던 건 아니에요. 농사도 크게 지었고요. 단지 문화가 너무 달랐어요.
Q . 사회에 나와서는 어땠어요?
A . 해운대에 있는 초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어요. 도시에 나와서 차이를 느꼈던 거랑 부산에 와서 느꼈던 거, 그거와는 또 다른 차이를 느꼈어요. 얘들은 도시에서, 해운대에서 참 넉넉하게 자랐거든요. 내가 기억하는 ‘아이다움’과 직접 만난 ‘아이다움’에 약간 차이가 있었어요. 어릴 때 내가 고민했던 문제가 얘들과 공통점이 별로 없다고 할까요.
초임 교사니까 선생님들끼리 쓰는 말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있어요. ‘나가서 줄 세우고 연습합시다’하면 나는 그 말을 금방 알아듣지는 못했어요. 어떻게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가서 어떻게 줄을 세우는지, 그런 게 아직 공유 안 된 상태니까 실수를 더러 했어요. 거기다 저는 아직 부산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생경한 문장에 사투리가 더해지니까 더 못 알아 듣겠는 거예요. 부산 사람들끼리, 교사들끼리 공유하는 느낌이나 늬앙스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거죠.
Q . 농촌에서 자란 게 어떨 때 티가 나요?
A . 전주여고 1학년때, 스승의 날이었어요. 반 친구들 모두 선물을 준비했죠. 모두 넥타이나 만년필 같은 멋진 상품들이었는데, 나만 선생님께 고사리 한봉지를 선물로 드렸어요. 엄마가 '이거 드리면 좋아하실거다'라며 억지로 싸주셨거든요. 무뚝뚝한 남자 담임선생님 이셨는데, 처음엔 당황하시다가 그 다음날 '이런 선물은 처음이었다. 맛있게 잘 먹었다.'하셨어요. 드릴땐 좀 창피했지만 뿌듯했어요.
부산 와서 스무살 되었을 땐가, 지나가던 아저씨가 돈을 5만원만 빌려 달래요. 자기가 경북대 80학번인데 서울 갈 차비가 없다고. 다시 돌려준다고 그래서 덥석 돈을 드렸어요. 순진해서 사람 말을 다 믿었어요. 아저씨가 거짓말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땐.
처음 부산에 와서 탔던 부산 버스는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빠르고 막 덜컹거리고. 아저씨가 화가 나서 일부러 난폭 운전을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길 지나는 사람들도 다들 너무 바쁘고 그래서, 화가 난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시골에선 멀리 가면 버스 요금을 더 내거든요. 아영에서 인월을 가면 1000원인데, 아영에서 남원을 가면 2500원, 이런 식으로요. 근데 부산 버스는 어딜 얼만큼 가든 다 1000원이라는 거예요. 정말 놀랐어요. 일부러 멀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판소리 잘 하겠네, 산을 잘 타겠네, 잡초를 잘 뽑겠네, 홍어 잘 먹겠네, 이런 말은 첫인사 하면 늘 농담처럼 듣는 말이고요(웃음).
부산 사람들은 쉬거나 여행할 때 숲이나 시골 같이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어 하잖아요. 전 그런 곳에 가고 싶진 않아요(웃음). 너무 많이 봐서요. 공기도 맑고 좋긴 한데, 시골에서 왔다는게 콤플렉스로 작용하는 건지, 그걸 부정적으로 느끼는 건지 확실하지는 않아요. 근데 여행이라는 자체가 공간이라기보다 시간으로 받아들여져요. 장소보다 그냥 여행을 하는 시간이 좋다, 그런 식으로. 그래도 기왕에 여행 가면 고향 같은 곳 보다는 발달되고 화려한 곳에 가면 더 감동을 받아요.
Q .‘다 때려치우고 농사나 짓자’라는 말 들으면 무슨 생각해요?
A . 이해 잘 안 되죠. 농사가 얼마나 힘든데요.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이 시골에서 살 집을 구하러 다니는 경우를 많이 봐요. 그분들이 그래요. 시골 사람들이 배타적이라고. 그 집단적 특성은 잘못됐다고요. 근데 전 그 농촌 사람들 입장에서 이해가 되는 거죠. 굳이 와서 뭘 하시려고. 농사를 지으면서 자족적으로 편안히 살기는 어려워요.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치열하게 사는데, ‘농사나 짓지 뭐’하는 마인드로 마을에 들어온 사람이랑 친해지기는 어렵잖아요.
Q . 두 살 아이가 있잖아요. 아이는 도시에서 키우고 싶어요, 고향에서 키우고 싶어요?
A . 사실은 고향에서 키우고 싶어요. 자연 환경도 좋고요. 어릴 때 기억들이 정말 좋거든요. 제가 어릴 땐 농촌 공동체 생활이 잘 되어 있었어요. 학교 걸어가다 모르는 어른을 만나도 인사하고, 마을 잔치하고, 관혼상제도 다 같이 나누고, 그런 거요. 하지만 그게 다시 재현될 수는 없어요. 시대가 달라졌으니까. 그러니까 고향에 억지로 갈순 없어요. 그래도 내가 가진 좋은 기억들을 애한테 선물해주고 싶어요. 지금은 남편이나 저나 부산에 있으니까, 부산에 있어야죠. 그리고 부산에 쭉 살겠죠.
씨를 뿌리고, 밭을 고르고, 작물을 돌보고, 땀 흘려 수확하는 삶이 그녀에게는 오롯이 남아있다. 그녀의 남동생 부부는 일찍 결혼해 농촌에 남았다. 홀로 되신 어머니와 셋이서 흥부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우리엄마, 농악대에서 꽹가리 쳐요, 라고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우리가 책이나 TV로만 봤던 푸근한 농촌의 기억을 그녀는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 기억이 이 약삭빠른 도시에서도 그녀를 살아남게 한다. 씨를 뿌리고 밭을 돌보면 수확을 할 테니까. 비바람 불고 얼어 터져도 봄엔 또 싹을 틔울 거니까.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정말 다시 찾지 않아도 좋은 것일까? 우리는 과연 건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을까?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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