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제주도 중산간에서 살고 있다. 제주는 화산섬이고 융기한 중앙의 한라산을 중심으로 360여 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기생화산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화산은 바다로 흘러가다 차가운 바닷물에 닿아 굳었고 섬에 내린 빗물도 마그마가 흐르던 길을 따라 흐르다 바닷가 근처에 용천수가 생겨 육지부가 강을 따라 마을이 생긴 것처럼 제주는 이 용천수를 따라 바닷가 부근으로 마을들이 생겼다. 한라산 고지대와 바닷가 마을 사이를 중산간이라고 부르는데 대략 고도가 해발 300m 정도 된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의 고도도 300m를 조금 넘는다. 이런 중산간 마을에도 마을이랄 건 거의 없지만, 사람들이 살았다.
중산간 마을들은 대부분 인구 밀도라고 할 것도 없이 주민이 매우 적다. 집안 대소사 음식을 돼지고기 위주로 하는 제주 풍습상 집에서 기르는 돼지로는 대소사를 다 치를 수 없어 따로 돼지를 사 왔는데 중산간 마을은 그런 돼지를 키우거나 따로 위탁받은 말이나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살았다. 숯장이들과 무당들도 살았고 버섯을 키우기도 했다.
기후는 좋지 않다. 강수량도 바닷가 마을들보다 높고 바람도 훨씬 거세게 분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운무가 자주 낀다. 사실 이런 날씨가 좋아서 여기에 살기로 했다. 새벽 운무가 낀 숲을 바라보면, 수묵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곧 겨울인데 아마 이번 겨울에도 폭설 때문에 며칠이건 갇힐 각오도 해야 할 거다.
집안에 사는 고양이 말고도 가끔 집 밖으로 고양이들이 보였다. 아내가 어느 날부터 집 앞 데크에 사료와 물을 두기 시작했는데 하나 같이 어린 아깽이들이 와서 먹는다. 어미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지. 아마 데크 밑 흙이 좀 파여있는 거로 봐서는 날씨가 궂으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집안에 사는 고양이 두 마리와 집 밖에 식사하러 오는 아깽이 세 마리는 며칠 눈치를 보다 야외 데크의 고양이들과 집안 고양이 사이에 있는 유리창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직도 집안 고양이들은 밖의 고양이들에게 털을 바짝 세우고 이상한 경계의 울음소리를 내긴 하지만, 집 밖 아깽이들은 이미 알아버렸다. 아무리 그래봤자 뛰쳐나와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이후에는 집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으르렁거리건 말건 태연하게 식사도 하고 햇볕이 좋은 날에 드러누워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고 나뭇잎이나 나비와 놀기도 했다. 집안 고양이들도 자신들을 무시하는 집 밖 아깽이들을 태연하게 감상하거나 어쩌다 서로 눈이 맞으면 얼음땡 놀이도 했다.
집에 자주 오는 아깽이는 세 마리로 온통 까만색과 치즈라고 부르는 녀석, 그리고 제집인양 아예 마당에서 사는 삼색이가 있다.
어느새 아침나절이나 낯에 태평하게 놀고 있는 집 밖 고양이를 바라보는 게 집안 고양이들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때로 창밖을 바라보는 집안 고양이들은 그 삼색이 녀석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그런 시간이 좋았다. 그 녀석은 창안의 인간도 자신을 어쩌지 못하리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았다. 이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어도 달아나지도 않고 제 하고 싶은 것을 하기에 바빴다.
며칠 전 아침에 현관문을 열자 아마도 밥을 먹으러 왔을 삼색이가 나보다 먼저 앞서 나가는 걸 봤다. 창을 사이에 두면 안전하지만, 문밖으로 나온 인간은 여전히 경계의 대상이었던 거다.
아마도 그날이었던 것 같다. 며칠 후 아내에게서 그 삼색이 녀석이 차에 치여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동네 사람이 발견해서 묻어줬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제 그 녀석은 더는 집에 오지 않는다. 밖에 놔둔 사료도 많이 줄어들지 않는다. 데크 아래 흙을 파놓은 구멍은 그대로인데 드나든 흔적도 아직 그대론데 주인이 오지 않는다.
고양이들은 요 며칠간 계속해서 그 녀석이 밥을 먹으러 오는 위치에 서서 삼색이를 찾는 듯하다. 나도 고양이들이 꼿꼿이 서서 밖을 응시하면 혹시 다른 아깽이들이라도 왔나, 싶어 밖을 바라보지만, 없다. 정말 죽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것에 관하여···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도 그중에도 여자나 남자나 어느 나라나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날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내 이름마저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고양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양이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소’라고 했을까? 고양잇과로 태어나야 했다면, 표범이나 호랑이 같은 거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했을는지도 모르지. ‘이왕이면 스노우 레오파드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고양이로 태어나야 한다면 ‘나는 좀 오래 먹을 것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고양이로 하고 싶어요’ 또는 ’좀 짧더라도 자유롭게 들고양이로 살고 싶소’라던가 ’중산간은 기후가 우리가 살기에는 너무 고생스러워서 온화한 캘리포니아 쪽을 선호합니다만.’라고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삼색이의 짧은 묘생을 더듬으며 차량 통행이 잦지 않은 중산간 도로에 어째서 고양이를 보지 못했거나 과속을 했냐며 운전자를 탓해 보지만, 그도 변변치 않다. 후련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건 분명 선택할 수 있는 문제였다. ‘고양이나 노루 같은 게 있을지 몰라’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아깽이는 조금 더 살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지금도 집안 고양이들은 창밖으로 무엇인가,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럴 때 삼색이가 왔으면 좋겠다. 능청스럽게 창을 사이에 두고 도발하듯이 재롱을 피는 그 녀석이 자꾸 눈에 밟힌다.
요사이 며칠 일상을 살다가 문득 불현듯이 삼색이에 걸려 동작이 일시 정지된다. 차를 마시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그 조그만 녀석이 목에 걸린다.
이 짧은 소고로 삼색이를 애도할 수 없을 것을 안다. 그래도 부디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것들에 관해 내려놓았기를. 그것으로 힘들어하지 않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