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만난 제주 사람들
방콕은 항상 모호한 표정을 짓는 고양이 같다. 이렇게 보내면 그것이 방콕인 것 같고, 다르게 보면 쉽사리 휙휙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일정치 않은 방콕의 인상을 좋아하지 않지만, 구역을 나누어 생각해 보면 꽤 재미있는 곳임은 틀림없다. 루프탑 바에 앉아서 화려한 야경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자면 이국의 정서와 함께 재미있는 곳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게 딱 우리나라의 반값밖에 안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도 없다. 외곽으로 나가면 전혀 다른 현지인들의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다. 원래의 모습들. 그곳에는 한가함이 있고 정다움이 있다. 그러다 카오산 로드 쪽으로 가면 가지각색의 배낭여행자들이 있고 환전소와 노천 카페와 이러저러한 여행 소품 가게들과 우리나라에서 삼십 만 원 한다는 드레드 머리를 길거리에서 이 만 원으로 할 수도 있고 곳곳에 타투샵과 미용실이 있고 치과에서 오랜 여행에서 꼭 필요한 스케일링을 하기도 한다. 태국에서는 스케일링을 반드시 의사가 해야 하도록 되어 있고 가격도 싸다. 시장으로 갈 수도 있다. 짜뚜짝이나 여기저기 널려있는 엔틱 마켓은 하루가 모자라다.
싫다면서도 여행에 뭔가 필요하거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출발할 때도 방콕은 자주 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매번 실패하기는 하지만 한국인 숙소에 찾아갈 때가 있다. 실패하는 이유는 한국말을 하기 때문이고 그런데도 가고 싶은 이유도 같다. 우리는 서로를 서로 지나치게 잘 알아서 예단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하곤 한다. 간혹 한국어가 가능한 숙소라는 이유로 다른 곳보다 비싼 경우도 있다. 모국어로 정보 교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가격에 포함한 것이다.
그래도 방콕에는 합리적인 가격의 한국인 숙소도 있어서 몇 번 묵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언젠가부터 제주에 산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주로 겨울이 되면 게스트 하우스를 하는 사람들이 잠정 휴업을 하고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방콕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제주에서는 게스트 하우스 신세를 질 이유가 거의 없기에 제주에서보다 더 많은 게스트 하우스 주인들을 방콕에서 만났다. 우스갯소리로 같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리라고 이야기했다. 아마 그들은 방콕에서 만났지만 다시 제주에서도 만나게 될 것이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버스로 네 시간 떨어진 작은 마을 빠이는 카오산 로드와 함께 태국에서 두 번째로 순수하게 여행자들이 만들어 낸 문화가 있는 곳이다. 예전부터 장기 여행에 지친 사람들이 싼 숙소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산악 지형이 만들어 내는 시원한 기후에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소소한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더 유명해졌다. 지금은 지나치게 상업화 되었다는 말을 듣기는 하지만···. 이곳도 제주 이주민들이 한겨울을 나는 지역이 된 것 같다. 얼마 전 빠이를 오랜만에 찾았을 때, 외곽의 집을 빌린 한 무리의 제주 사람들을 봤다. 그들의 독특한 동안거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아니면 피한지라고 해야 할지도.
제주에서 방콕까지 직항 노선이 취항했고 가격도 비싸지 않다. 이제 인천 등지로 가서 외국으로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인도를 무척 사랑해서 한국보다 인도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친구는 제주로 와서 베이징을 거쳐 인도로 갔다. 홍콩으로도 직항이 생겼는데 때로 십만 원 이하로 항공권을 구할 수 있으므로 홍콩을 거쳐 목적지로 가는 것도 좋은 경로가 될 수 있다.
베이징까지의 항공권을 이용해서 동유럽이나 러시아로 갈 수도 있고 방콕이나 홍콩을 경유해서 발리나 호주로 가는 경로도 있다. 방콕에서 프랑스 파리까지의 항공권은 이 십 만원대에 나오는 경우도 많다. 제주에 살면서 김포와 인천을 거쳐 파리까지 가는 것보다 베이징이나 상해, 방콕이나 홍콩을 거쳐 가는 것이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어졌다.
세계 여러 곳에서 제주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제주 토박이로서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지 않겠나. 많은 사람이 봄, 여름, 가을에 일하고 겨울에 여행하는 삶을 그리며 제주에 온 것 같다. 그들의 겨울여행이 지속될 수 있을까? 그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