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마라도는 뭍에서는 못 하는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태풍이 부는 마라도는 그런대로 매력이 있다. 태풍이 불지 않더라도 마라도에 바람이 불면 파도의 하얀 포말이 섬으로 올라와 마치 함박눈이라도 내리는 것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 거가다 태풍이 오면 사람들은 하나둘 섬을 빠져나가고 도항선도 당연히 오지 않는다. 남은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다. 아마 열 명이나 될까? 그나마 집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섬은 더 황량해진다.
섬에 한 번 갇혀보는 게 소망이었다. 연인과 같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혼자도 좋았다. 그날도 그렇게 미리 태풍이 불 걸 알고 있었다. 매표소 여자는 “오늘 들어가면 못 나와마씨.”라고 했다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의보 내린 건 알암수과? 며칠 갈 거 닮은 디.”라고 했다. 그 말에도 역시 그냥 고개를 끄덕했다. 마라도 친구는 밤새 술 마실 친구를 입맛을 다시면서 맞았다.
마라도 최남단 비가 있는 식당에서 술판을 벌이기로 했다. 단순하기로는 이를 데 없는 술상은 낮에 미리 해녀 할망에게 사 둔 소라 한 망태기가 있었다. 냄비에 우르르 붓고 푹푹 삶고 소주만 있으면 되었다. 삶는다. 그래야 많이 먹을 수 있다.
밖에는 비바람이 모질게 불어대고 있었다. 미리 단단히 묶어둔 파라솔과 햇빛을 가리는 데 쓰는 검은 천이 펄럭이고 눌러둔 돌이 들썩거렸다. 냄비에 소라가 덜그럭 거리며 익는 소리가 났다. 안주 없이 마시지는 말자며 기다리다 드디어 첫 번째 접시에 가득 담긴 소라가 나왔다. 바로 다음 소라가 냄비 안으로 들어갔다.
몇 잔의 술을 마시며 무심코 밖을 쳐다봤다. 비바람은 더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고 먼바다 수평선 근처로 번쩍이는 번개도 보았다. 그러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주잔을 든 채로 ‘헉!’하며 얼어붙었다. 유리문 밖에 어떤 여자가 서 있었다. 한 놈은 소주잔을 든 채로 다른 놈은 입에 소라를 물고 잠시 상황 파악의 시간이 필요했다. ‘손님이잖아.’
문을 열어 눈을 마주치자 “저··· 소주 한잔 할 수 있어요?”라고 했다. 그냥 손님이었다. 하지만 ‘그냥’ 손님은 아니다. 비바람이 치고 마지막 배는 떠났고 며칠간 배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덩치 큰 여자다. 그녀의 뒤로 다른 여자가 있었다. 친구라면 꽤 눈길을 많이 받을 것 같았다. 한 명은 왠만한 남자보다 크고 다른 여자는 아주 작았다. 옷차림만 보면 딱 서울 여자들이었다.
친구와 나는 눈을 마주치고 그녀들에게 그러라고 했다. 만 오천 원짜리 해산물 한 접시를 권하자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비바람이 치니 들어와서 마시라고 했지만, 한사코 밖에서 마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창밖의 바다와 나 사이에 그녀들이 풍경처럼 끼어들었다.
해산물 한 접시가 떨어지기 전에 소주를 더 주문한 그녀들에게 방어 한 접시를 공짜로 줬다. 그녀들은 감동했다. 그녀들은 그 후로도 또 소주를 주문했고 삶은 소라 한 바구니가 함께 나갔다. 무슨 원수가 졌는지 작정하고 술 마시려는 그녀들 앞에서 친구와 나는 숙연해졌다. 비바람 피해가며 투명한 술잔을 입에 털어 넣는 그녀들은 저승문 앞에서 이승의 마지막 술을 마시는 것 같았다.
날이 밝았지만, 여전히 파도가 거칠었다. 도항선은 오지 않을 게 뻔했고 위험해서 낚시도 나가지 못하는 섬사람들은 여전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섬이 다시 비었다. 이런 날에는 바람을 맞으며 섬을 산책하는 또 다른 맛이 있다. 마라도 바람에 몸을 맡기면 쓰러지지 않을 정도다. 그렇게 섬을 천천히 걷고 있다가 그녀들을 봤다. 그녀들도 섬을 산책하고 있었다. 손을 잡고 걷기도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서로를 의지하기도 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태풍 부는 섬은 그녀들이 간절히 해 보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 주는 곳이었던 것 같다.
민박집 형은 낚시도 하지 않으면서 혼자 온 여자 손님은 항상 긴장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손님이 떠난 후 방을 청소하다 극약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녀는 온종일 멍하게 절벽 끝에서 바다만 바라보며 며칠을 지내다 떠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친구를 데리고 다시 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