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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완 Apr 21. 2017

만가지 교훈이 서린 집

골조 공사가 시작된 집터에서···

집을 짓는다는 건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무지한 초보 건축주의 시선으로 통 그려지지 않던 모양과 규모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 같다. 지나친 선은 잘릴 것이고 모자란 선은 충분해질 것이고 그 사이에는 여러 가지 면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지붕이 덮여 하늘을 받치면 채색된 자연과 근사하게 어울리는 집이 될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아직 집에는 수직의 선과 면이 없지만, 기초공사가 마무리된 집터에 올라 작은 방과 거실, 부엌과 안방. 집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작은 방은 너무 작지나 않은지, 동쪽으로 머리를 해봤다가, 서쪽으로도 해보고···. 가구가 놓인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샤워실을 빙빙 돌며 몇 달 후 샤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뜻밖에 옷방 끝의 작은 서재는 쓸만해 보였다. 작은 규모는 집안 어느 구석도 소외된 공간으로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어릴 적 집은 구석구석 숨을 곳이 많았고 숨길 곳도 많았다. 감귤 수확 철이 되면 삼촌들은 감귤 한 포대씩을 어깨에 짊어지고 오셨는데 이 귤을 보관하는 방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귤은 쉽게 물러져서 나는 할아버지의 명을 받고 그 방에서 귤 사이를 헤엄치듯 누비며 상한 귤을 골라내곤 했다.


지금 그 집은 카페가 되었다. 나와 내 어머니가 자던 방은 아마도 그 카페에서 가장 좋은 자리가 되어 한쪽 벽이 투명한 통창으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안에는 어머니가 잠을 쫓으려 허벅지를 꼬집고 계셨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다 등을 돌려 벽을 잠시 쳐다보다 잠이 들었다.


우리 집은 여인숙이었고 그 방은 '안내실'이었다. 유리로 된 여닫이문이 바람에 흔들리면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님의 인기척을 찾았다. 낮에는 편집증이셨던 외할아버지의 말을 따라 편지 대필을 하곤 했다. 밤에 꼬집었던 허벅지의 남은 부분을 찾아 여전히 잠을 쫓고 계셨다.


외할아버지는 우체국장이셨고 누구에겐가 전해졌어야 할 편지와 함께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은 편지들을 보관하는 방도 있었다. 모스부호로 전보를 보내는 기계를 가지고 놀다가 몰래 한 통씩 열어보곤 했다. 대게 남편이 아내에게 또는 부모님 전 상서로 시작했던 편지들은 돌아오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지금 짓고 있는 집은 그들의 유산이다. 내 어머니의 시퍼렇게 멍든 허벅지와 수취인 불명의 편지들을 버릴 수 없었던 외할아버지와 세상의 모든 낭만을 노래하는 젊었던 내 아버지와 정치보다는 농사에 능숙했던 할아버지와 세 번째 아내로 시집와서 내리 아들 셋을 낳아 당당하던 할머니와 열여덟에 시집와서 한 번도 섬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외할머니의 남겨진 말들의 집이다. 전해졌어야 할, 그래서 전해지지 못한 편지들의 집이다.


아내가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고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별밭을 보며 맥주를 마시고 내 아이들이 수줍게 또는 떳떳하게 남자 친구를 내게 소개할지도 모르는 집이다. 아마도 제주에서 사람 사는 가장 높은 땅일지도 모르며 그런데도 한라산보다는 바다에 가까운 집이다.


그래서 이 집이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을 때까지만 잘 견디어서 그 이후에는 폭삭 무너져 내려서 이야기만 남기고 사라져 버려라. 카페 따위로 리모델링 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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