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기억, 추억
길 건너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생겼다. 낡은 건물은 모던한 인테리어로 완전히 탈바꿈되었다. Naim 앰프와 Bose 스피커 조합의 근사한 오디오에서 John Coltrane의 트럼펫 소리가 흘러나오고 개방된 주방에선 여러 명의 요리사가 흰색과 검은색의 유니폼을 입고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간혹 피어오르는 주방의 증기는 그 자체로 주변과 잘 어울렸다. 파스타의 맛은 훌륭했다. 내가 무언가에 빠져 있었을 때, 이 사람들은 타인의 시각과 청각 그리고 미각을 위해 노력했었나 보다. 다만, 가격은 자본주의의 습성을 그대로 닮아서 감동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천연 발효 빵집이 있다. 사라졌다고 알려졌던 제주 토종 밀을 재배하고 천연 발효 기법으로 빵을 만든다. 베스트셀러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1]』의 제주판이다. 그 빵을 먹고 있자면 내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 은혜롭다는 생각마저 든다. 젊은이 몇 명이 이런 일을 해내다니. 이 집은 가격마저 이타적이다. 이 빵집은 주인이나 손님에게 이 사회에도 동시에 이타적이다.
태국 음식점도 문을 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문을 닫았다가 저녁 시간에 다시 연다고 한다. 저녁 시간은 예약만 받는다고 해서 맛은 보지 못했다.
스페인 음식점은 몇 군데가 있는데 내비게이션 없이는 찾아가지 못할 곳에 있다. 베트남 쌀국수집은 여러 곳이 있다. 베트남 며느리들이 하는 곳도 있고 멋진 무대를 만들고 한 달에 한 번씩 콘서트를 여는 식당도 생겼다.
인도 음식점은 예전부터 있었는데 인도 현지에 비하면 맛은 뒤지지 않고 가격은 서울에 있는 인도 음식점보다는 싸다. 네팔리 요리사는 인도에서나 이곳 제주에서나 훌륭한 탄두리 치킨과 짜이와 커리를 만들고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이국의 요릿집들이 제주에 생기고 있다.
전에는 화덕 피자와 수제 맥주를 먹고 싶어서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갔다. 김포 공항에서 내려 홍대나 인사동에 가서 한 손에 화덕 피자와 다른 손에 맥주를 들고 있으면 뭔가 인생의 중요한 것을 얻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화덕에 굽지 않은 피자를 찾기가 힘들고 직접 로스팅 하지 않는 커피숍을 가려면 스타벅스에 가야 할 것 같다.
제주의 빨랫방망이를 ‘마께’라 부른다. 육지부의 것보다 볼이 넓고 손잡이 외에는 사각형으로 생겼다. 오랜만에 고향에 갔더니 친구들이 ‘마께 팔단’네 가서 한잔하자고 한다.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물어봤지만, 친구들은 실실 웃기만 했다.
간판도 없는 작은 점방. 격자 유리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탁자 하나에 할망 한 분이 앉아 있다. 이 집의 별미는 ‘군벗 무침’. 표준어로는 ‘군부’인 이 딱딱한 등껍질을 가지고 바위에 딱 붙어 있어 손으로 쉽게 채취할 수 없던 이 군벗을 뾰쪽한 제주 호미로 떼어내곤 했다. 껍질을 벗기고 삶아서 양념에 무쳐내면 되지만 손이 많이 가서 좀처럼 어머니가 해 주시는 일도 없고 식당에서도 하나의 음식으로 내놓기는 어색하고 밑반찬으로도 곤란한 그런 음식이었다. 새콤하게 무쳐내면 꼬들꼬들 식감이 좋아 몇 그릇이라도 금방 동나곤 했다. 동네 외곽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는 이걸 특화해 어엿한 하나의 메뉴로 내어놓더니 그 맛이 그리운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기도 하고 변변한 안주라고는 없고 누구든 가면 술을 팔아주는 이 집에는 일찍 술을 마시기 시작한 고등학생들의 단골 식당으로도 유명해졌다. 학생들은 종종 술을 마시고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기 일쑤였고, 할망은 식당 밖으로 쫓아가며 욕 한 바가지와 함께 ‘마께’를 던졌다. 여럿이 도망가더라도 ‘마께’는 정확히 한 명의 뒤통수를 때렸다. ‘한 놈만 팬다’라는 식이다. 그래서 이 식당은 ‘마께 팔단네’로 불렸다.
현무암으로 검은 제주의 갯바위에서 작은 게를 손으로 잡아와서 푹 삶아 광목천에 넣어 비틀어 짜내어 국물을 내고 죽을 끓이면 깅이죽이 된다. 성산의 어느 해녀 식당(해녀 탈의실 옆 공동 운영 식당)에서 이 음식을 먹었다.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당번제로 해녀들이 식당을 운영한다. 식당은 착한 가격에 해녀들이 직접 잡은 것들로 음식을 내기에 맛도 좋아 육지 친구들이 오면 자주 갔었다. 전날 술을 마시는 경우도 많았고 깅이죽은 속을 달래는 데도 좋았다. 양은 무지막지하게 많았었지만 남기는 경우는 없었다. 부엌에서 해녀할망들이 죽을 끓이느라 쉴새없이 솥을 젖고 있었다.
언젠가 이 식당에 들렸을 때, 신용카드 결제기가 새로 들여져 있었다. 앞서 있던 손님이 신용카드를 내밀었지만, 해녀 할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나서서 결제하고 영수증을 할망에게 줬더니 영 마뜩잖은 표정이다. ‘이게 돈이란 말인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게죽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어린 시절에 몸이 아파서 끙끙거리면 할머니는 갯가에 나가 게를 잡아 삶고 장롱 깊은 곳의 광목을 꺼내 짜서 죽을 끓여줬다고 했다. 갯가에서 게를 잡는 것도 힘든 일이겠지만 그걸 삶고, 있는 힘을 다해 국물을 내고, 죽을 끓이는 동안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저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아직도 그 음식을 하는 식당이 있느냐며 내게 되물으셨다.
지금도 그곳은 게죽을 한다. 몇몇 식당은 그 메뉴를 없애버리거나 식당 자체가 사라져버렸지만, 여전히 해녀 할망들은 바람 팡팡 부는 갯가에 나가 일일이 손으로 게를 잡아 게죽을 끓인다. 그 옆으로는 마을 땅이었던 땅을 팔아 거대한 리조트가 들어섰다. 이 땅을 파는 게 옳았냐는 것은 지금도 논란이라고 한다. 게는 제주어로 동쪽에서는 ‘겡이’, 서쪽에서는 ‘깅이’다. 그러므로 ‘겡이죽’을 달라고 하면 된다.
아버지는 술을 참 좋아하셨다. 일요일 아침에 어머니는 부엌에서 분노의 도마질을 하고 계셨다. 어제도 아버지는 잔뜩 잡수시고 들어오신 것이다. 두드리고 있는 것은 애저였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돼지 새끼다. 그 애저를 도마에 올려 칼로 잘게 다져 참기를과 쪽파를 넣어 물회를 만든다. 그건 아버지에게, 제주 남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해장음식이었다. ‘돼지 새끼회’라고 불렀다.
심심치 않게 돼지 새끼회집이 있었지만 이제 거의 없다. 하는 곳을 알기는 하지만 돼지가 아닌 소고기를 가지고 한다. 애저를 위해서 임신한 돼지를 잡은 것이 아니다. 임신한 돼지가 죽으면 그 새끼를 먹은 것이다. 양돈 기술은 아마도 발전했을 것이고 애저는 더는 흔하지 않게 되었을 테고.
이스탄불에서 양머리 요리를 먹었다. 두 쪽으로 쩍 갈라진 두개골이 접시 가득 담겨있었다. 갖은 향신료로 잡내를 잡았다고 하지만 그 냄새를 덮었을 뿐이다. 채소와 향신료 속에 숨은 허연 골이 보였다. 씹으니 양의 기억들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뇌수의 맛은 이것이 음식은 아니라고 가르치는 듯 했다. 이집트 룩소르에서는 비둘기 요리가 유명하대서 먹었다. 비쩍 마른 비둘기 한 마리가 일인분이었다. 살은 별로 없고 잔뼈가 많았다. 머리와 발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온전한 한 마리다. 이곳에는 적어도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은 아닌 것 같았다. 노래하고 춤추며 노는 것 이외에는 오로지 먹을 것만 생각하는 것 같은 태국 친구들은 붉은 개미집을 털었다. 나무에 달린 개미집을 잡아내리다 온몸에 개미가 달라붙었다. 팔과 다리, 등과 사타구니에 죽음을 각오하고 두 개의 앞니로 살갗을 한껏 물고 떨어질 줄 몰랐다. 집을 잃고는 더는 살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얀 개미집이 작은 접시에 담겨 반찬으로 올라왔다. 낮에 물렸던 느낌과 그걸 떼어내려 했을 때, 죽을 듯이 물고 있었던 개미만 기억났다.
집 앞에는 양꼬치 골목이 생겼다. 중국 특유의 상술은 흩어져 있던 양꼬치 집들이 한곳으로 계속 모이더니 양꼬치 골목을 만들었다. 나는 이제 양꼬치를 자주 먹는다. 새로 생긴 양꼬치집에는 메뉴판도 주인도 종업원까지 모두 중국말이었다. “한국어 메뉴판 있어요?”라고 했더니 따로 코팅한 메뉴판을 갖다 줬다. 나는 여전히 군벗무침과 깅이죽과 애저회를 추억하겠지만, 양꼬치의 고소함을 기억하려 애써야 할 것 같다.

[1] 와타나베 이타루 저, 정문주 역, 더숲,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