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서포터즈 10기 활동 - 행복 스트레스, 탁석산
북스타그램 계정 @b00._.00k 에서 창비 서포터즈 10기 활동을 하고 있다.
창비에서 나온 책 중 가장 유익한 책은 탁석산 저자의 '행복 스트레스'였다.
이 책을 더 많은 사람이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따로 서평을 작성해 보았다.
인간은 행복보다 훨씬 크다 - 골포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굉장히 친근한 단어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행복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우리는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도 행복에 대해 저술한 도서를 쉽게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책은 행복을 어떻게 얻느냐에 대한 저술을 할 뿐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행복 스트레스’는 행복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자세히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작가가 찾아본 개념을 정리한다. 2부에서는 현대에서 왜 행복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고찰이 적혀있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많은 도움이 되지만, 작가는 조금 더 나아가 3부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행복한 삶에 대해서 정리한다. 1부, 2부는 행복에 대한 개관적인 정보이기에 모두에게 행복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1부, 2부의 내용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나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말은 “행복이라는 말을 지금처럼 사용한 것은 서양의 역사에서도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p.35) 라고 생각한다. 행복이라는 말이 언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삶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지만, 행복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은 인류의 역사를 따져 보았을 때 정말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이다.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단어가 지금은 왜 인생의 목표로 까지 올라오게 된 걸까? 그 유래를 알고 나면 행복이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작가는 행복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공리주의 때부터라고 설명한다.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벤섬은 ‘최대 행복’이라는 표현에서 ‘행복’을 ‘쾌락’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다.”(p.39) 작가는 현재에 자신이 공리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사회 안에 수많은 공리주의가 녹아있다고 말한다. 공리주의를 이토록 퍼트린 데에는 계몽주의가 한몫했다고 언급한다. “계몽주의자들은 실로 인간이 불행한 곳에서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p.67) 계급적으로 불평등한 시기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계몽주의가 반드시 필요했고, 계급과 상관없이 다수의 행복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면서 계몽주의와 공리주의는 함께 퍼져나갔다. 그렇게 계급제도가 폐지되면서 세상에는 민주주의가 대두됐다. 민주주의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믿는다. 작가는 우리가 몇몇의 성공하는 케이스들을 보면서, 모두가 성공을 탐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왜 민주주의 시대 사람들은 노력은 하지 않고 손쉬운 성공을 추구하는가? 그것은 즉각적인 성공이 가능해 보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p.87) 사람들이 노력 없이 결과를 얻고자 한 이후로 ‘일반 개념’ 혹은 ‘추상 명사’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만족할 만한 내용을 찾을 수는 없다. 바로 이런 것이 추상명사의 특징이다.”(p.93)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따지고 정의해 놓지 않으면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한다. 따라서 행복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해서 결국은 절대 충족될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렸다.
작가가 책에 쓴 모든 말이 맞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13년도에 초반 인쇄가 된 만큼 감안하고 읽어야 하는 점들이 있다. 우선 이 책은 굉장한 계몽주의의 성향을 띄면서 많은 부분이 명령조로 쓰였다. 따라서 독자는 작가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자신에게 주입하려 한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명령조를 감안하고 보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내용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남자와 여자에 대한 편견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이 3부의 한 챕터에 조금 실려있다. 지금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을 법한 문장이라 할 수 있지만 13년도에 쓰인 것을 감안해 보았을 때, 이런 문장은 설명을 돕기 위함이지 작가 본인이 악의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란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가장 아쉬웠던 점 하나는, 작가가 행복에 대한 문제는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점이다. 물론 일리는 있는 말이다. 미약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어떻게 행복하기 힘든 조건의 사회 속에서 행복을 쉽게 느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국가가 해결해주기를 바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는 노골적으로 비난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수많은 행복에 대한 도서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점들은 오히려 시야를 좁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지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행복을 무분별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행복의 의미가 어색하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우리는 행복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는 말 앞에서 ‘도대체 행복이라는 게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복이라는 말은 추상 명사이기 때문에 절대 충족될 수 없다. 그러나 ‘행복하고 싶어.’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소중한 친구와 대화하면서 기쁨을 느끼고 싶다.’ 혹은 ‘하루만 날을 잡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먹고 싶어.’와 같이 구체적인 기쁨을 선정하면 그것은 충족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
확실히 작가의 말대로 현재 사회는 개개인이 행복을 누리기 정말 어려운 환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나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수많은 시간이 흘러오면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고 의미가 바뀌어 왔듯이, 현재 시대는 행복이 그런 의미로 사용되는 시대인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듯, 행복이 완벽하게 정의되는 사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사회를 서서히 변화시킬 수 있다. 사회가 먼저 발달하면 구성원들이 천천히 쫓아오게 되듯, 구성원들이 먼저 발달하면 사회가 따라오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은 행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가끔은 마음을 다스려 행복을 느끼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쫓고 휘둘려서는 안 된다. 행복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단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행복을 넘어서 훨씬 더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p.146)
2020.04.17. 골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