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산 종이

고려에서 온 종이

by 종이소리
(제왕운기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이 책이 지금 나이가 몇 살이라고?”


“지금이 2025년이고, 이 책이 처음 출판된 해가 1287년쯤이니까… 738살쯤?”


“헐…738살...”


노트북 속 이미지 앞에서 딸아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요즘 유행하는 ‘할 말을 잃었다’는 표현이 입술 위에 멍하니 걸렸고, 활처럼 휘어진 눈썹 아래 커다란 두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믿기 어렵지? 나도 그랬어. 종이의 역사랑 여러 자료를 찾아보다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야. 그러니까, 믿어도 괜찮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사진을 거기서 받은 거야?"


"아니, 이야기가 좀 길어."


제왕운기[帝王韻紀]

지승자료를 찾다가 알게 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제왕운기를 “고려 후기 문신 이승휴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서술한 역사 시”라고 정의했다.


1287년 충렬왕 때 간행된 이 책은 이후 여러 차례 중간되었으며, 보물로 지정된 판본들 또한 몇 가지 전해진다는 설명과 몇 개의 책 이미지를 첨부하고 있었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은 이미지가 있었다.

바로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된 『제왕운기』 표지였다.


나는 오래전, 1939년 2월 17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제왕운기는...중략...미황색으로 물들이고 지승으로 철합하였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뛰었다.


드디어!

고려시대 지승(紙繩)의 실물을 추정할 수 있는 사료와 마주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승의 사료들은 대부분 조선중, 후기의 기록들이었다.


나는 곧바로 삼성출판박물관에 메일을 보냈다.


『제왕운기』 표지에 보이는 지승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공예가로서, 이 자료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연과 함께 출처를 밝히고 사용할 수 있도록 정중히 허락을 요청했다.


다행히 몇 가지 주의사항과 함께, 자료 사용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받은 자료가 바로 아이의 눈을 커다랗게 뜨게 한 바로 이 자료이다.


(사진은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제왕운기』 원본 표지에서, 지승(紙繩)으로 보이는 끈의 일부를 확대한 것으로, 삼성출판박물관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였습니다.)


“이건 삼성출판박물관에서 허락받은 『제왕운기』 표지 이미지야.”


“이 이미지를 꼭 허락을 받고 써야 되는 거야?”


“그럼! 저작권이라는 중요한 지적재산권이 있잖아. 아무리 공공저작물이라 해도, 내가 만들지 않은 자료라면 출처를 밝히고 허락을 받아야 해.”


“근데 왜? 다 쓰라고 공개된 거 아니야? 내 친구들도 내 사진 막 퍼가는데?”


“그건 조금 달라. 여긴 분명히 ‘소장자: 삼성출판박물관’이라고 명시돼 있지? 이런 경우, 상업적 출판이나 학술지, 강의록 등에 사용할 땐 저작권을 표기하는 게 기본이야.

그렇게 하는 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더 당당하고 지혜로운 일이거든.”


“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당당하다는 말, 저작권이라 쓰고 ‘양심’이라고 읽자 뭐, 그런 뜻이지?”


“그렇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 엄마도 엄마 작품을 아무 허락 없이 막 쓰는 사람이 있으면 속상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말했다.


“여기, 이 끈 보이지? 바로 네가 조금 전에 만들어봤던, 한지로 꼬은 노끈. 그게 바로 지승끈이란다.”


“우와…”


역시나, 아이는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마치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얼굴엔 커다란 두 개의 동그라미만 그려진 것 같았다.


나는 웃음을 꾹 참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이 고려시대의 책 『제왕운기』가 아니었으면, 엄마는 종이의 진짜 가치를 모른 채, 그저 종이공예가라고 큰소리쳤을지도 몰라. 그래서 삼성출판박물관에서 이 귀한 자료를 사용하게 해 준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 몰라.”


그랬다. 지식을 쌓고 지혜를 채우는 일, 또 배움과 공유의 태도를 후학에게 전하는 일에 있어 구체적인 자료 하나 없이 그저 기술과 아이디어만 자랑하며 ‘공예가’라고 떠들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새 작품을 구상하고 시작하기 전, 언제나 역사와 근거자료부터 준비하는 것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바로 저작권을 존중하는 태도다.


애써 만든 지적 재산을 내 작업 안에 정중히 담아낼 수 있다는 건, 내가 만든 콘텐츠의 가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이에게 들려줄 역사와 옛날이야기가 더 자랑스럽고 당당해질 수 있도록 자료를 요청하고, 출처를 밝히고, 마음을 담아 글을 쓰는 이유이다. 그런 엄마의 뜻을 아이가 알아주길 바라는 의지를 담아 이야기를 이었다.


“살도 종이고, 뼈도 종이야. 그리고 이 책을 완성하는 데 쓰인 못도, 사실은 종이였지.”


“못이 종이라고? 종이로 못을 만들었다고?”


충격의 연속극이라도 보는 듯, 아이는 흥분해서 선풍기를 켜고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엄마! 내가 아무리 한지공예에 대해 모르는 문외한이라지만, 어떻게 못이 종이일 수 있다는 거야?”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내일 들려줄게. 단, 네가 이 한지 한 장으로 지승끈을 끝까지 다 만들어낸다면 말이지.”




※ 이 글을 위한 소중한 자료의 공유를 허락해 주신 삼성출판박물관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본 기획은 2021년에 시작되었으며, 자료 사용 관련 이메일 송수신은 2021년 8월 17~18일에 이루어졌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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