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로들

그 선택에 필요했던 용기

by cranky witch
"직업이나 경력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이지요.
우리의 삶은 평생 몇 번의 변화를 겪습니다."

찰스 헨디의 '포트폴리오 인생'을 읽다가 찾은 문장.


그러고 보니 고작 서른 중반을 지나가는 내 삶도 여러 변화를 겪었구나.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분기점이 달라지지만, 먼저 직업이나 경력을 기준으로 한번 돌아보려고 한다.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보기엔... 너무 힘겨워.)


첫 번째 선택 : 교육이 내 길이야!


상경계열 전공이었던 나의 대학시절에서 가장 잘한 건, 정말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여러 기회들-어학연수, 단기 해외 봉사, 장기 해외 봉사, 외국 교환학생 가이드, 소모임, 그리고 심지어 학생회장까지-에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취업 희망 분야가 은행, 증권 계열에서 교육 계열로 바뀌었다.

그즈음의 나는 '인간적인 성숙함'에 집착 수준으로 매달리고 있었는데, '이 분야가 나를 인간적으로 성숙하게 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교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진로를 바꾸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여러 교육 봉사를 다녀보니 교육자가 되는 것만큼 스스로를 '되돌아봐야만' 하는 직업이 없다고 생각했다.

앞에 선 존재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그대로 날것의 반응을 토해내는 아이들 앞에 서야만, 억지로라도 강제로라도 나를 다듬어가며 조금이라도 성숙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기준은 좀 부끄럽다.

이타성이라고는 1도 없는 이기적인, 나만을 위한 선택이었다.

(성숙해지고 싶다는 사람이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는 이 미성숙한 상황이란... 허허)


결심한 후 은행권 취업 스터디를 탈퇴했고, 교육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우연히 교육 회사에서 올린 공고를 보고, '여름 방학에 잠깐 경험을 쌓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발을 들였다.

그 회사에서 강산이 변할 동안 일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는가.



두 번째 선택 : 어라...? 교육은 내 길이 아닌 듯...


약 1년간 일선에서 아이들을 만나며 교육하는 일을 하다가, 당시 스타트업이었던 회사의 초기 멤버로 합류를 제안받았는데, 재미있게도 직무는 '운영/회계'였다.

교육계에 있고자 선택한 길이었는데, 과거의 배움을 살려 대학 전공의 연장선상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게 스티브 잡스가 말한 Connecting the dots인가?)


제안을 받고 굉장히 망설였는데 나중에 보니 잘한 선택이었다.

맡은 직무의 일을 하면서도 강의 업무를 병행했는데, 강의를 하던 어느 토요일에 '내가 뭘 하고 있지?'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주제를 풀어내기 위해, 실제 이야기와 나의 경험을 덧붙이곤 했었다.

내가 머리로만 외운 메시지와 경험해서 진심으로 말하는 메시지의 차이는 아이들의 집중도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때에는 이 교실에 있는 눈빛들이 내 목소리에 몰입하고, 듣는 것을 넘어서 느끼고 있다는 걸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수업의 빈도가 늘어날수록 나는 내 과거의 경험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의 이야기에 내가 몰입하지 않는데, 아이들이 그럴 리가 있나.

수업에서 꺼내 쓸 깨달음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주머니가 거덜 났던 것이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보다 내 경험을 쌓는 게 더 재밌는 사람이구나.

선생님은... 안 맞는 것일 수도?!


그때부턴 수업 출강 횟수를 줄여가며 직무에 집중했다.

(수업 이외의 직무를 맡은 직원의 강의 비중을 줄이자는 회사의 정책과 맞물리기도 했다)

이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세 번째 선택 : 저기... 이것도 아닌 것 같아... 또 바꿔도 돼?


체계를 잡아가는 초창기 스타트업에서 일한 덕인지 직무가 좀 바뀐 편이다.

처음에는 '운영'이었던 것이 '재무'였다가 '파이낸싱'으로 영어화됐다가 결국 'HR'로 정착했다.


재무를 전문 분야로 커리어를 쌓아가자고 결심했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아..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여러 번 분야를 바꾼 터라 또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굉장히 한심스럽기도 했다.

'도대체 나란 사람에게서 끈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였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어떻게 사나. 이젠 하나를 정할 때도 됐지 않니?'


한 분야에 진득하게 열정을 발휘하지 못하는 내가 더더욱 싫어지는 나날을 참고 지내오다가,

어떻게 회사에서 기회가 주어져 HR로 직무를 옮기게 되었다.

숫자 속에서 정보를 뽑아내는 것보단 직원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내 규칙을 만드는 것이 더 보람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네 번째 선택 : 주어진 것 중에서 고르는 거 말고, 진짜 원하는 거 말이야


그러나 HR로 직무를 바꾸기로 했던 건 차선책이었다.

이미 일을 해온 경력이 있으니 이 중에서 가능성이 있을 만한 선택지에서 골랐던 것이지,

생뚱맞지만 정말 해보고 싶은 다른 것은 선택지에 넣어주지도 않았었다.

몇 년간 힐끔힐끔 눈동자만 굴려가며 몰래 쳐다봤을 뿐.


그러다 어떤 계기로 10년간 다닌 회사를 나오게 되는 아주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예상치 못하게 백수가 된 나는 앞으로 내가 어떤 길을 갈 수 있을지 선택지 하나하나를 다시 살펴보았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 옵션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또 한 번 더 바꾸기로 했다.

(이 변화를 더 자세히 다룬 글-앞만 보기 위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남기는 증거)


네 번째가 마지막일 수 있을까


서른 중반에 지금까지 해온 걸 고이 놔두고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이 선택이 내 진로에서 겪는 마지막 변화일까?

나는 앞으로 이 분야에서 죽기 전까지 한해 한해 전문성을 쌓아갈 수 있을까?

만약... 또 바꾼다면 정말 나는 끈기가 없는 사람일까?


나에게 네 번의 변곡점이 있으리란 걸 대학생의 내가 몰랐듯이,

앞으로 주야장천 한 분야를 팔지 또 이리저리 바꿔 다닐지 지금의 나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알고 싶다!)

그렇지만 최소한 바꿔온 나를 자책하지는 말자.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최소한 해보기라도 했잖아, 그것도 성실하게.

이길보라의 책처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그랬던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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