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녹차라떼샷추가 May 30. 2024

사진보다 진한 기억 (휴대폰 없이 노는 날)

1,722일째 육아 중


한울이와 서울랜드 야간개장에 다녀왔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돌아다니다가 휴대폰 충전하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다행히 배터리 1% 남기고 입장권 QR코드를 보여주고 서울랜드에 입장했다. 휴대폰 충전하려고 여기저기 가게를 돌아다니며 물어봤지만 하나같이 충전기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야외에 설치된 휴대폰 배터리 대여소가 있었다. 그런데 배터리 대여를 하려면 휴대폰으로 앱을 깔고 신청을 해야 했다. 이런... 배터리가 없어서 배터리 충전소를 찾았더니 배터리가 있어야 배터리를 대여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휴대폰 없이 노는 날로 정했다.


서울랜드에서 처음 탄 놀이기구는 '크라켄 아일랜드'였다. 건물 기둥 사이로 얽힌 그물을 타고 이동하는 놀이기구였다. 한울이를 먼저 보내고 나도 같이 따라 올라갔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상당히 높은 위치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터 문제였는데. 이제는 옆 공간으로 그물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한 사람씩 이동해야 하는데 그물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난 높은 곳이 무섭다. 한울이도 잠깐 고개를 내밀더니 무서웠는지 다시 되돌아왔다. 한울이와 내가 주저주저하는 사이에 뒤로 기다리는 사람이 늘어섰다. 어쨌든 건너야 했다.


한울이에게 먼저 용기 내서 건너가라고 했다. 한울이는 다시 고개를 쑥 내밀더니 성큼성큼 그물망을 건너갔다. 아까 되돌아온 게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이제는 내 차례가 되었는데, 정작 나는 너무 무서워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벌벌벌 손발이 떨렸다. 먼저 건너간 한울이는 내가 넘어올 때까지 지켜봐 줬다. 기다리고 있는 한울이를 보며 용기를 냈다. 이후 몇 번의 그물망을 더 건너야 했지만 다행히 큰 일 없이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여기 올라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호들갑 떠는 것만 보면 마치 내가 어린이 같았다.


한울이는 또봇트레인이라는 롤러코스터와 라바스윙이라는 뺑뺑이 놀이기구를 좋아했다. 기다리는 줄이 길었지만 몇 번이나 탔다. 줄이 길면 지루할 법 한데 다행히 기다리는 시간이 심심하지 않았다. 한울이랑 장난도 치고, 가위바위보 게임도 하고, 한울이가 난간에 올라가는 것도 봐주고,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얘기도 하다 보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휴대폰이 없으니 한울이와의 교감이 끊어질 일이 없었다.


밤 9시가 되자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한울이는 불꽃놀이를 보며 예쁘다고 반응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불꽃놀이 소리가 무섭다며 울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무서움이 가셨나 보다. 어디선가 나이가 들면 무서워하던 것도 무섭지 않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울이를 보니 그 말이 떠올랐다. 물론 나는 여전히 높은 곳을 무서워하지만 말이다. 한울이와 퇴장시간인 밤 10시까지 놀고 서울랜드를 나왔다.



한울이는 집에 가는 길에 "다음 주에도 똑같이 경마공원 갔다가 서울랜드 오자"라고 얘기했다. 한울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 하루가 한울이에게 즐거웠다는 의미이다. 몸은 피곤했지만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휴대폰이 없어 사진 한 장 찍어주지 못했지만 한울이에게 인상 깊은 하루를 선물해 줬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눈물을 글썽였다. 엥?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내가 전화도 안 받고 집에도 안 와서 실종된 줄 알았다고 했다. 아내한테 얼마 전에 사람 많은 곳에 가면 공황장애가 온 듯 불안해진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아내는 내가 어디선가 쓰러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얼마나 불안했는지 경찰서는 물론이고, 지하철역, 서울대공원, 서울랜드 등 내가 갔을 법한 곳에 전화를 돌려서 무슨 일 없었냐고 물어봤다고 했다. 아내가 이렇게까지 유별나게 행동한 이유는 서울랜드 퇴장이 밤 10시였는데 저녁 7시 퇴장으로 착각한 탓도 있었다. 여하튼 아내는 내가 연락이 안 된 탓에 혼자서 애를 태웠다.


휴대폰 없이 서울랜드 다녀온 건 나름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내를 걱정시켜서 미안했지만... 여튼 다녀온 지 벌써 4일이 지났는데 글을 쓰는 지금도 한울이의 표정과 행동, 분위기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울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억하고자 사진과 영상을 찍었는데, 오히려 사진이 아닌 내 기억 속 한울이 모습이 더욱 진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사진이 한울이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해 주긴 하지만 정작 내가 간직해야 할 기억의 단편을 잘라냈던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매일 달라져도 네가 좋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