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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Oct 23.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7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일본 여행

상큼한 목소리가 그리운 아내에게,


오늘 하루도 잘 보냈나요?

한울이와 도쿄 여행 중에 문득

당신 생각이 나는 빈도가 잦아졌어요.

맑은 하늘, 따스한 날씨, 길가에 핀 나팔꽃,

먹음직스러운 음식, 그리고 한울이 귀여움까지

여행이 만족스럽고 즐거울수록

당신의 빈자리가 아쉽게 느껴지네요.

당신은 잘 지내고 있죠?

온종일 논문 쓰느라 책상에 붙어 있겠지만

그런 와중에도 감사와 기쁨의 순간들이

당신에게 찾아왔을 테지요.

같이 붙어 있을 때에는

그런 감사와 기쁨의 순간들을

당신에게 전해 듣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서로 바빠서 연락도 잘 못하네요.

쫑알쫑알 늘 듣던 당신 목소리가 그리워져요.




오늘은 기치조지를 떠나 료고쿠로 이동했어요.

료고쿠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동네가 되겠네요.

료고쿠는 도쿄 중심부에서 동쪽에 있어요.

스모경기장과 국립에도박물관으로 유명하지만

여기를 선택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요.

바로 온천시설을 갖춘 호텔 때문이에요!!

운 좋게도 특가로 나온 방을 예약했답니다.

관광지역아니라 볼 게 많지는 않지만

교통이 편리해 큰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아요.


호텔 체크인하자마자 온천에 다녀왔어요.

한울이랑 샤워하고 뜨뜻한 탕 속에 들어갔는데

"아이고 좋아라~"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역시나 한울이도 좋아했고요.

여기 온천시설이 꽤나 잘 되어 있더라고요.

제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야외온천이었어요.

몸을 따뜻한 탕 속에 담그고 있으면서

코 끝으로 찬 공기를 들이마시니

몸은 편안하고 기분은 상쾌하더라고요.

작년에 오사카에서 료칸호텔에 묵었을 때

한울이와 온천 목욕했던 기억이 올랐어요.

이제 한울이와 이미 경험했던 일도 많아졌네요.

새로움을 찾는 것만큼 흥미진진하진 않지만

아는 즐거움을 다시 경험해도 만족스럽네요.




요즘 한울이가 언어에 더 관심이 많아졌어요.

여행하다 보면 이동 시간이 많은데

그때마다 한울이는 노트를 꺼내서 글자를 써요.

처음에는 생각나는 말을 한글로 적어놓다가

며칠 전에는 안 쓰는 글자를 적기 시작했어요.

뱕, 뵷, 뀛, 쬽, 췒 같은 글자들이요.

자기가 써보고 읽고 하면서 재밌어하더라고요.

"이건 어떻게 읽지? 뵷? 웃기다. 하하하"

오늘도 지하철 타고 오는데 한울이가 갑자기

"아빠~ 한울이 한자도 쓸 줄 안다!?"라고 했어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노트를 봤더니

牛(우), 田(전), 日(일) 한자들을 써놨어요.

"엥? 저걸 어디서 보고 썼어?"라고 물으니

지하철역 이름, 광고 표지판 보고 썼다고 해요.


한울이가 이 글씨들은 무슨 뜻이냐고 묻길래

제가 아는 선에서 설명도 해줬고,

제가 모르는 건 번역 카메라로 찍어서

한울이에게 보여주며 설명도 해줬어요.

몇 번 반복했더니 앱 사용 방법을 금세 배웠요.

이제는 무슨 표지판이나 전단지만 보면

한울이는 자기가 번역해서 알려주겠다면서

휴대폰 카메라여기저기 찍고 있답니다.

번역해서 보기가 하나의 놀이로 자리 잡았네요.

한울이는 참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지

새로운 걸 접하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면서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어요.

그런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기특하고 대견해요.




오늘은 긴자에 위치한 미술관에 다녀왔어요.

아트아쿠아리움뮤지엄이라는 곳인데요.

수족관의 다양한 형태와 원색 조명을 활용해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낸 미술관이었어요.

물고기들이 화려한 치장을 하고 하늘 위에서

도도하고 우아하게 춤을 추는 느낌이랄까요?

수족관과 미술관을 여러 군데 다녀봤는데

둘을 섞어 놓은 전시는 처음이었어요.

전시 자체만 놓고 보면 만족스러웠답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전시장에서 봤던

물고기들의 자태가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그렇게 감동을 받은 순간은 정말 찰나였고

사실 대부분은 한울이 쫓아다니면서

작품 손 대지 못하게 하느라 바빴어요.

작품에 손 대면 안 된다고 여러 번 얘기해도

한울이가 말을 잘 듣지를 않더라고요.

제가 장난치는 걸로 생각했나 봐요.

제가 화낼수록 더 약 올리는 것 같았다니까요.

전시관 구석으로 데려가서

하지 말라고 정색하면서 여러 번 얘기하니

그제야 말을 좀 듣더라고요.

여행하면서 이럴 때가 가장 힘들고 지쳐요.

모처럼 좋은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인데

한울이 챙기느라 전시도 못 보고 돈만 쓰고

사람들에게는 민폐만 끼치고 나오니까요.

언제쯤 한울이와 이런 전시를 같이 관람하고

서로의 생각과 감상을 나눌 수 있을까요?

아직 5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한테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체험형 혹은 유아용 전시는 괜찮지만

아직 일반 전시를 한울이와 관람하긴 어렵네요.




한울이는 제가 편지로 적은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있어요.

그렇지만 의도와는 상당히 다른 장면들이

한울이에게 각인되는 것 같아요.

매일 한울이에게 인상 깊은 순간을 묻는데

그 답변이 항상 제 예상을 벗어나네요.

오늘은 한울이가 온천 목욕 아니면

미술관 방문을 기억하길 기대했어요.

그런데 한울이는 호텔 엘리베이터

1층부터 30층까지 버튼 모두 눌러본 것,

거리 전광판에서 스모 경기 스치듯 잠깐 본 것,

온천 가는데 아빠가 수건 안 가져간 것 등

제가 느끼기에는 사소하고 피식 웃음이 나는

에피소드들 위주로 기억을 하더라고요.

매일 한울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른과 어린이의 하루 중 인상 깊은 장면이

상당히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주변에서 애들은 어차피 기억을 못 하니

여행 가도 소용없다는 얘기도 많이 하더라고요.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진 않아요.

아이들이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은

어른들이 기억하는 장면과 다를 뿐이지

아이들도 본인들한테 인상적인 장면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믿으니까요.

그런 장면들이 하나씩 쌓여서 아이들의

삶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재료가 되겠지요.

한울이가 제 기대와는 상관없이

이번 여행에서 본인만의 인상적인 장면을

풍성하게 얻어갈 있으면 좋겠네요.


오늘은 이만 줄일게요.

이제 도쿄 여행도 어느덧 절반이 지났네요.

어렵게 얻은 기회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한울이와 찐하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갈게요.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당신도 수고 많았어요.

그럼 안녕!


점점 말이 많아지는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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