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녹차라떼샷추가 Oct 24.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8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일본 여행

오늘따라 더 그리운 아내에게,


오늘 하루도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여행 중이라 작은 일도 크게 느껴지는 건지

아니면 원래 육아가 이렇게 다사다난한 건지

하루에도 제 감정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하네요.

길게 여행하면 대방의 밑바닥까지 본다는데

지금 제 모습이 그런 것 같아요.

점점 인내심도 바닥나는 것 같고요. 하아...


오늘은 한울이에게 진심으로 화를 냈어요.

지난번처럼 욱! 해서 실수를 한 건 아니에요.

제가 화난 이유는 당신도 공감해 줄 거예요.

저녁으로 야키니꾸를 먹으러 식당에 갔었어요.

여기 식당은 숯불화로가 통째로 나오더라고요.

숯불화로가 문제의 근원이었죠.

한울이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 재밌어 보였는지

집게를 집고 숯을 들쑤시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화로에 입 바람을 불고(!!)

수증기 보겠다며 물을 화로에 뿌리고(!!)

온갖 위험한 장난은 계속하더라고요.

재밌는 실험이라 생각한 모양이에요.


호기심 가는 마음은 이해가 되는데...

위험한 행동이니 하지 말라고 설명도 해 보고

애원을 해 봐도 소용없더라고요.

결국 한울이를 식당 구석에서 혼을 냈어요.

위험한 행동 하면 다친다고 하지 말라고요.

거기서 한울이가 그만뒀으면 좋았을 텐데

자리로 돌아와서도 계속 장난치길래

식당 안에서 소리를 칠 수밖에 없었어요.

"서한울!!!!!!!! 하지 말라고 했지!!!!!"

그제야 한울이도 아빠가 화난 걸 알았나 봐요.

말 안 듣는 한울이한테 진심으로 화가 나서

밥 먹는 동안 한울이에게 퉁명스럽게 대했네요.

그때부터는 아빠 눈치를 좀 보더라고요.

자기도 기분 나쁜지 "아씨..." 거리긴 했지만요.

기분 나쁜 티 내는 것도 혼내줘야 했지만

저도 지쳐서 장난 안 치는 것만으로 넘어갔네요.




겨우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한울이한테 화낸 일로 기분이 좋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게 웬걸...

한울이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 아빠한테 혼나서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시무룩해 있었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게 의아하더라고요.

그래서 한울이한테 물어봤었어요.


아빠 : "아빠한테 혼났는데도 기분 좋아?"

한울 : "좋지! 왜 안 좋겠어~"

아빠 : "...." (뭐지?)

한울 : "오늘 달이 저렇게 밝잖아"

한울 : "한울이는 달을 보면 기분이 좋거든"


이 대목에서 한 번 충격을 받았어요.

아빠한테 혼나서 기분 나쁘고 삐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행복한 마음으로 전환이 된다니요.

게다가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언제나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면서

이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요.

한울이가 유독 해맑은 아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행복해 보이는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갑자기 대화에 흥미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한울이에게 조금 더 물어봤어요.

'아빠가 화낸 걸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요.

사실 한울이가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랐어요.

아빠가 한울이를 위해서 그랬다는 것을요.

물론 그 바람은 헛된 기대에 불과했지만요...


아빠 : "아빠가 화내면 무섭지 않아?"

한울 : ".... 안 무서운데??"

아빠 : "엥? 안 무섭다고??!!!! 그러면 어떤데?"

한울 : "음... 아빠가 화내면 놀리고 싶어 져"

한울 : "메롱~ 약 오르지~ 하면서"

아빠 : "......" (이 자식이 부글부글)


여기서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답니다.

한울이가 제 말을 왜 안 듣는지 이제 알았어요.

제가 화내도 한울이는 무서워 하기는커녕

더 장난치고 약 올리고 싶어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제가 뭘 잘못했나 싶더라고요.

한울이한테 친절하게만 해줬나 생각도 들었고요.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

아이를 잘 통제하는 것도 부모의 역할일 텐데

그 부분은 소홀히 하지 않았나 후회도 되더라고요.

이제는 조금씩 엄격한 아빠가 되어보려고 해요.

휴우... 부모 역할하기가 참 어렵네요.




오늘 낮에는 일본국립미래과학관에 다녀왔어요.

너무너무너무너무 만족스러웠답니다.

전시 내용은 물론이고, 전시 구성, 전달 방식,

전시 규모, 차별화까지 기대 이상이었어요.

한울이와 한국에서 과학관에 많이 다녔잖아요.

거의 전국에 과학관은 다 가본 것 같은데요.

아쉽게도 국내 과학관보다 더 좋더라고요!

처음에는 2시간 정도 머물 생각으로 갔다가

문 열 때 가서 문 닫을 때 나왔답니다.

그 뒤에도 다른 일정이 줄줄이 있었는데

다 취소하고 과학관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몇 가지 인상 깊은 부분들도 알려주고 싶어요.

미래관 입구에 대형 지구본이 설치되어 있는데

1층~6층까지 전체 공간에서 보이도록 해놨어요.

대형 지구본은 작은 디스플레이로 만들어져서

시시각각 변하는 지구의 모습을 보여줘요.

마치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처럼요.

그리고 시간에 맞춰서 짧은 영상도 보여주는데

환경오염, 자원 고갈 등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지구본이 가장 잘 보이는 2층 테라스에서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에 대한 설명과 함께

여러 환경 관련 체험 전시를 구성해 놨더라고요.

"하나뿐인 지구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미래관이 전달하는 번째 메시지였어요.

첨단 기술 소개와 신기한 체험을 보여주기 앞서

미래를 고민하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관점을 먼저 보여준 것이라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대학원에서 환경을 전공했던 지라

미래관이 제시하는 전시의 스토리 초반부터

깊이 몰입되고 흥분되더라고요.

덕분에 한울이한테도 한참 설명해 줬네요.

 

다음으로 이어지는 전시 내용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질문들' 코너였어요.

미래관을 방문한 노벨상 수상자들이 

다른 방문자들에게 평생 간직하길 바라는 

메시지를 한 군데로 모아놨더라고요.

총 28명의 수상자가 메시지를 남겼는데

놀랍게도 그중 18명이 일본인이었어요.

마침 이날이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결정된 날이라서 눈여겨보게 되었어요.

"궁금해하는 마음을 잊고 살진 않나요?"

여러 메시지 중 가장 인상 깊은 문구였어요.

한울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요.


다른 전시들도 물론 즐겁고 유익했어요.

과학 상식이 필요한 방탈출 게임도 했고

고령화 사회를 오래 대비한 일본 답게

노화로 인한 신체 영향을 이해하고

그 영향을 직접 체험하는 전시도 있었어요.

한울이는 애완 로봇에도 관심이 많았고요.

로켓 엔진도 한참을 들여다봤고요.

신기하게도 줄기세포를 궁금해하더라고요.

줄기세포 연구와 실제 활용에 관한

10분짜리 영상이 있었는데요.

한울이한테 어려워 보여서 나가려 했는데

저한테 설명해 달라 하면서 끝까지 보더군요.

본의 아니게 저는 한울이 여행 가이드 겸

과학 해설사 겸 통역사 역할까지 하고 있네요.

가끔은 저도 한울이가 부러워지네요.




앞으로 한울이는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요?

한울이와 지내다 보니 더 궁금해지네요.

지금은 마냥 해맑고 호기심 많은 어린이지만

점점 선택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을 하고

나름의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가겠지요.

당신도 저도 부모로서 기대하는 바가 있겠지만

우리는 그저 한울이를 응원해 주자고요.

결정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게 용기 주고

실패의 순간에는 품을 내어 위로해 주고

성공의 순간에는 같이 축하하면서요.


그럼에도 한 가지 한울이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한울이도 우리에게 용기 주고 위로해 주고

같이 축하해 주는 아이되어 주면 좋겠네요.

사실 우리가 마주한 삶이 녹록하진 않잖아요.

지금도 걱정도, 아픔도, 슬픔도, 좌절도 많은데

둘이서 힘내며 겨우 버텨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편지에 적고 나서 보니 한울이는 이미

우리에게 힘을 주는 존재인 것 같네요.


아까는 제 말도 안 듣고 놀려 대기만 해서

한울이한테 기분이 좀 안 좋았는데요.

지금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참 고맙고 기특하네요. 한울이도 벌써 많이 컸어요.

이렇게 아빠 따라 여행도 오고 말이에요.

갑자기 남은 기간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요!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일게요.

내일 또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

저도 어서 한울이 옆에 가서

귀여운 한울이 꼭 껴안고 잠들어야겠어요.

당신도 잘 자요. 좋은 꿈 꿔요.


한울이의 여행 가이드가 된 남편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