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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Oct 28.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9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일본 여행

지금이라도 달려가 안기고 싶은 당신에게,


당신을 남겨두고 와서 그런지

도쿄에서의 시간이 생각보다 더디게 흘러가네요.

한울이와 여행 온 지 9일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무슨 3달은 지난 것 같아요.

힘들어서 그런가? 하하하...

한울이도 이제 엄마가 보고 싶은가 봐요.

어제까지만 해도 한울이는 기분 좋게 잠들었는데

오늘은 엄마 보고 싶다며 울먹였어요.


한울 : "엄마 보고 싶다... 으앙..."

아빠 : "아빠도 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 힝..."

한울 : "우리 몇 밤 자면 한국 가?"

아빠 : "오늘까지 네 밤만 자면 돌아 가"

한울 : "그럼... 오늘 빼면 세 밤 남았어?"

아빠 : "응! 맞아! 이제 얼마 안 남았지?"

한울 : "렇네!?"


혹시 한울이가 여행이 재미없나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라고 했어요.

다만 여행이 길어져서 좀 지쳤나 봐요.

매일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 잠자리는 어색하고,

낯설고 새로운 자극을 계속 받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여행 초반에는 열도 나서 무리했었죠.

이제야 엄마를 보고 싶다고 하는 걸 보니

한울이가 의젓하게 잘 참아주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한울이 못지않게 저도 당신이 보고 싶어요!!

당신은 늘 한울이를 가장 보고 싶어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도 당신을 가장 보고 싶어 했어요.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 힘내볼게요.

한국 가면 한울이보다 저를 먼저 안아주세요!




오늘은 오전에 쉬면서 기력을 회복했어요.

온천도 하고 드디어 밀린 빨래도 했답니다.

빨래 정리하다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한울이를 놓고 혼자 잠들어 버렸어요.

제가 처음에 3분만 잔다고 하니까

한울이가 타이머를 맞춰놓고 기다렸어요.

시간이 지나서 한울이가 절 깨웠는데

제가 계속 1분만... 3분만... 하다 보니까

어느새 17분이 지나갔더라고요.

그동안 한울이는 휴대폰으로

타이머 시간을 계속 바꿔가면서

제가 일어나길 기다렸어요.

마지막에는 제가 하도 안 일어나니까

한울이가 제 얼굴 위로 올라타서

"한울이가 얼마나 많이 기다렸는데!!"

"아빠~!! 일어나!!" 하며 소리를 치더라고요.

그 말에 미안해서 얼른 정신을 차렸답니다.


아침 식사로 규동을 먹으러 갔었는데

식당에서 재미난 일이 있었어요.

둘이 음식을 주문해서 밥을 먹는데

한울이가 음료수가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키오스크에서 주문해 줄 테니

번호표 나오면 혼자 가서 받아오라고 했죠.

한울이는 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자기 음식은 자기가 받아와야 한다고 말하니

마지못해서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한울이는 자기가 받아오겠다고 말은 했지만

혼자 다녀오기 불안하고 무서웠나 봐요.

계속해서 저한테 같이 가달라고 애원하더라고요.


한울 : "아빠 같이 가주면 안 돼?"

아빠 : "안 돼! 한울이가 시킨 음료수잖아."

한울 : "같이만 가주면 받는 건 한울이가 할게."

아빠 : "아빠는 여기 있을 거야. 혼자 받아 와!"

한울 : "그러면 한울이 보이는 곳에 있어 줘"

아빠 : "자리에서 보고 있을게"

한울 : "아이... 진짜..."


제가 안 간다니 한울이가 긴장하더라고요.

번호표는 꽉 쥐고 다리를 떨면서

번호가 뜨는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어요.

마침내 한울이 번호가 떴어요. 1572번!

한울이는 저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의외로 씩씩하게 주문대로 걸어가더라고요.

주문한 음료수가 주문대 위에 놓여 있었어요.

종업원에게 번호표를 건네주더니

낚아채듯 음료수를 가지고 돌아오더라고요.

한 손에 주먹을 불끈 쥐어 하늘 높이 들고는

아주 우쭐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에요.

'아빠 없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거든!'이라고

손짓, 몸짓, 표정이 말해주더라고요.

당신도 그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더 웃겼던 건 한울이가 음료수를 한 입 마시더니

"웩! 맛없어! 내가 생각했던 맛이 아니야!"라며

한 모금 마시고 저한테 마시라며 건네줬어요.

그 표정이 되게 씁쓸해 보이더라고요.

'기껏 용기 내서 받아 왔는데!! 맛이 없다니!!'

라는 표정이었어요. 그 모습에 웃음이 났네요.

한울이한테는 아쉬운 경험이었겠지만

혼자 음료수 받아 올 용기 낸 건 기특하더라고요.

앞으로 한울이에게 이런 시련을 계속 주려 해요.

한울이가 독립적으로 동하도록 도와주려고요.




오후에는 한울이와 닌자박물관에 다녀왔어요.

입장료가 비싸서 고민했었는데(인당 3만원!)

생각보다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닌자가 되어 표창 던지기 체험도 하고

사무라이 복장에 칼을 들고 사진도 찍었어요.

한울이가 표창 던지기에 소질이 있더라고요.

투어 참가자들이 표창 던지기 토너먼트도 했는데

꼬맹이 한울이가 3등 했어요. 무려 80명 중에요.

표창 몇 번 던지더니 과녁에 딱딱 맞추더라고요.

가끔 이럴 때 보면 대단하다니까요.


한울이가 표창 던지기에 어찌나 몰입했던지

박물관을 나와서도 온갖 걸 집어라고요.

나뭇가지, 돌, 열매, 종이, 물병 등 가리지 않고요.

"내 표창을 받아랏!!!!"라고 외치면서요.

휴... 또 그거 말리느라 한참을 씨름했네요.

가뜩이나 과격한 싸움놀이 좋아하는 애한테

표창 던지기 체험을 시켜준 제 탓이죠.

아이고 내 팔자야...


저는 닌자박물관의 역사해설이 좋았어요.

사무라이가 활약했던 시대적 배경은 물론이고

닌자 계급과 역할도 알게 되었거든요.

일본 사람들이 왼쪽으로 걷은 이유도 들었어요.

과거 사무라이들이 왼쪽에 칼집을 찼기에

칼집이 부딪히지 않도록 왼쪽으로 다녔대요.

칼 부딪치는 소리는 곧 싸움의 신호라

사무라이들도 서로 조심했다고 그러네요.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고요.

사무라이가 일본 문화에 미쳤던 영향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어요.


한울이는 일본 사무라이가 멋있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이순신 장군이 다 이겼어"라고 하더군요.

생각해 보니 무시무시한 사무라이들을 상대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이순신 장군이 대단하네요.

게다가 서로 다른 곳에서 본 콘텐츠를

연결시켜 이해하는 한울이도 대단하고요.

한울이를 데리고 전쟁기념관도 가고

책도 읽어주고 했던 보람이 있었어요.




오후에 종이접기박물관도 다녀왔어요.

사실 박물관보다는 전문 상점에 가까웠지만요.

재밌었던 건 화장실 표시도 안내 문구도

종이접기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더라고요.

다양한 색종이와 종이접기 책을 팔았는데

하나씩 볼 때마다 한울이 눈이 반짝이더라고요.

한울이도 사고 싶었던지 마음에 드는 색종이를

은근슬쩍 제 앞으로 갖다 놓더라고요.

아빠랑 같이 여행해 준 한울이가 고마워서

종이와 3개를 선물로 사준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제가 봐도 너무 예쁜 종이가 많더라고요.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포켓몬 색종이부터,

우주 색종이, 귀여운 캐릭터 색종이까지

추려도 8개가 넘길래 큰맘 먹고 다 사줬어요.

한울이가 종이접기는 워낙 좋아해서

어차피 다 쓸 때니까 아깝지 않더라고요.

한울이는 기뻤는지 그 많은 색종이를 껴안고는

자기가 모두 들고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들어주겠다고 해도 마다하고요.

이럴 때 보면 마냥 어린아이 같이 귀여워요.

크진 않지만 한울이한테 선물을 사줄 수 있는

아빠라서 감사하고 기쁘기도 하고요.




아참 오늘은 대단한 발견이 있었어요.

드디어 일본에서 포켓몬 빵 찾았습니다!!!!

그동안 마트를 돌아다녀도 늘 허탕만 쳤어요.

일본에서 포켓몬 빵 찾기가 어렵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만 닌자박물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들린 마트에서 결국 만났습니다.

한울이가 포켓몬 빵을 먼저 발견했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마트 안에서

한울이랑 저랑 같이 손 잡고 춤을 췄다니까요.

마치 대단한 보물이라도 찾은 기분이었어요.

그야말로 세렌디피티!

우연한 발견으로 인한 기쁨의 순간이었어요.




한울이와 있으니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하루에도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네요.

한울이와 같이 지내다 보면

저까지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요.

표창 던지기 놀이 하나에도

예쁜 색종이 하나에도

포켓몬 빵 하나에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지니까요.

'세렌디피티'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건

바로 어린아이들일지도 모르겠어요.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작은 일 하나에도

즐거워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을 텐데...

순수한 기쁨을 잊어버린 것이 아쉽네요.

사회생활하며 어른들하고 어울릴 때에는

뭐 하나 재밌는 일 찾기가 어려웠거든요.

어쩌면 우리가 행복에서 멀어진 이유는

아이들의 세계와 떨어졌기 때문일 것 같아요.

그런 의미로 우리 가정의 더 큰 행복을 위해

둘째... 도 가지면 참 좋겠네요... 흠흠...

물론 당신 박사 학위 받고 나서요.

일단 일본에서 장어덮밥 많이 먹고 갈게요.

아니 뭐 또 혹시 모르니까요.


오늘 편지는 이만 줄여야겠네요.

너무 속 깊은 얘기까지 나올까봐서요.

당신도 수고 많았어요.

한국 돌아가면 꼬옥 껴안아 줄게요.


언제나 당신의 기쁨이고 싶은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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