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녹차라떼샷추가 Oct 29.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10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일본 여행

여행지에서 매일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가 

여전히 힘들고 부담스럽네요.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한울이를 재우고 나면 저도 침대에 누워

편하게 책 읽고 쉬고 싶은 마음이에요.

아침부터 아들님 모시고 돌아다니면서

다치지 않게 기분 상하지 않게 신경 쓰다 보면

저도 녹초가 되어 숙소에 돌아오거든요.


그럼에도 틈틈이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혼자 깨어 있는 시간에는 당신이 보고 싶고

당신도 저와 같은 마음인 걸 알기 때문이에요.

박사 논문 쓰느라 힘들고 외로울 텐데

한울이 소식으로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몸이 고된 것쯤은 얼마든 견뎌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나름 혼자만의 시간도 즐기고 있답니다.

매일밤 사케를 잔씩 마시고 있어요.

한울이를 놓고 밖에 나갈 수는 없으니

어두운 호텔 방에서 노트북 화면을 조명 삼고

당신에게 쓰는 편지를 안주 삼아서요.


편지를 쓰다 보면 당신 생각도 깊어지고

옆에 있는 한울이도 보고 싶어 져요.

그때는 의자에 앉아 눈 감고

당신 얼굴을 떠올려 보고,

침대로 가서 잠든 한울이 손을 잡고

잠깐 누웠다 오기도 해요.

당신 생각 한 번, 한울이 숨결 한 번

그리고 사케 한 모금이 어우러지는

낭만적인 도쿄의 밤을 보내고 있어요.

술은 잘 모르지만 오늘 마시는 사케는

유독 더 가볍고 발랄한 느낌이라

저도 같이 기분이 좋아지네요.




오늘은 일본의 대표적인 미디어아트 그룹

'팀랩'(teamLab★)의 전시를 보고 왔어요.

작년에 봤던 오사카 전시도 인상적이었는데

다른 주제로 도쿄에서도 전시를 하더라고요.

그동안 여행 일정을 한울이 중심으로 짰지만

이 전시만큼은 제가 욕심을 좀 냈답니다.


팀랩 도쿄의 전시 주제는 '플래닛'이었어요.

실제 자연물과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서

애니메이션이나 환상 속에서 만날 법한

숲 속 환경을 구현해 놓았더라고요.

예를 들어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을 거니는데

물 위로 꽃잎과 물고기의 움직임을

프로젝터로 쏴주는 방식이었어요.


팀랩의 특장점은 '인터랙션'인데요

물고기의 움직임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을 인지하고 그에 따라서

물고기도 움직임을 달리 보여주더라고요.

그 덕분에 물 위로 비친 물고기 이미지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당연히 한울이도 도망가는 물고기 잡겠다고

물 위를 첨벙첨벙 헤집어 다녔고요.

전시 초반부터 옷은 다 젖었지만

이렇듯 자연과 디지털 기술이 접목되어

색다른 경험을 보여줄 수 있으니

그 값어치는 충분히 한 것 같아요.


다른 공간에서는 돔 형식의 천장 위로

꽃잎이 흩날리는 영상이 틀어져 있었어요.

어두운 공간에서 바닥에 편안하게 누운 채로

꽃잎 영상을 관람하는 방식이었는데

계절에 따라 꽃잎이 다채롭게 변화하는데

마치 제가 작은 곤충이 되어서

넓은 꽃밭을 뛰어다니는 기분이었답니다.

몽환적인 분위기에 넋 놓고 보게 되더라고요.


한울이와 같이 누워서 관람하는데

피곤했는지 한울이는 제 팔을 베고 잠들었어요.

덕분에 한울이가 일어날 때까지

꽃잎 영상만 1시간 봤어요.

지루하기는커녕 너무 좋았답니다.

예술적 영감이 뼛속까지 쏙쏙

스며드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사실 이 전시는 더 시간을 들여서

작품 하나하나 오래 만끽하고 싶었는데

한울이와 같이 있다 보니까

그렇게 하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어요.

그래도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나중에 한울이가 크면 더 많은 전시를

관람할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하게 되네요.




제 인생에서 너무 늦게 알게 되어서

아쉬웠던 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예술'이에요.

제가 이해하는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상상을 확장해 가는 사람들이더군요.

새로운 생각과 관점, 다양한 시도를 통해

인간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몸소 증명해 내는 사람들이고요.


어렸을 때에는 학교에 성실히 다니면서 배운

교과서 내용이 세상의 전부 같았어요.

대학에 가고 세상을 직접 경험하다 보니

교과서에 한 주제로 혹은 한 과목으로

담을 수 없는 세상이 펼쳐지더라고요.

누군가 옆에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세상을 알려주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제가 틈만 나면 한울이를 데리고 다니며

박물관, 미술관을 찾는 이유기도 해요.

다양한 예술 전시를 통해서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렇게 만들어낸 결과물을 경험하고

한울이의 상상을 넓혀주고 싶어서요.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융합되면서

언젠가 한울이도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길 바라면서요.

제가 아빠로서 한울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물이라고도 생각하고요.

부와 명예를 물려주기보다는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요.

 



한울이는 한울이 인생을 만들어갈 테니

당신과 저는 우리 인생을 계속 고민해 봐요.

남은 우리 인생이 아쉽지 않도록 말이에요.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삶의 모습이라도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일게요.

사케가 과했는지 점점 눈이 감겨요.

오늘도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에게 말하는 동안 행복했어요.

내일 또 편지할게요.


영원히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남편이,





이전 25화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9일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