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녹차라떼샷추가 Oct 29.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11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일본 여행

"안녕. 잘 자. 고생했어. 사랑해."

조금 전 영상 통화로 당신을 만나 좋았어요.

그 사이 당신 얼굴이 많이 야위었더라고요.

꿈에서도 분석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니

논문 심사 준비하느라 잠도 밥도 못 챙겼겠지요.

귀여운 한울이 사랑도 받지 못하고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우리 통화 내용 대부분이 당신 논문 얘기였어요.

아쉽기도 했지만 충분히 이해해요.

지금은 '잘 지냈어?'라는 안부 인사보다

당신 논문 심사 준비가 더 시급하니까요.

그렇다고 미안해하지는 말아요.

당신한테 중요한 일은 제게도 중요해요.

아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박사 논문 작업에

제가 말동무가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져요.

당신이 관심 갖는 어떤 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남편이고 싶거든요.

외롭고 험난한 과정을 이겨낼 수 있도록

옆에서 늘 응원해 줄게요. 힘내요!




이제 슬슬 도쿄에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오늘은 한울이와 기념품을 사러 다녀왔요.

한울이가 아빠와의 여행을 추억할 수 있는

선물을 고민하다가 두 군데를 골랐어요.

바로 포켓몬센터와 지브리샵이었어요.


선물 사러 가기 전에 한울이와 약속을 했어요.

한국 돈으로 10만원 넘지 않는 선에서

한울이가 원하는 선물로 3개를 사주겠다고요.

금액을 10만원으로 정한 이유는

사실 저한테 하는 다짐이었어요.

그동안 여행과 출장을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제가 기념품 사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잖아요.

이번에는 한울이를 위해서

10만원 정도는 쓰고 싶었어요.

일본에서 아빠랑 잘 있어준 게 고마워서요.

선물 개수를 3개로 제한한 이유는

한울이가 고민하면서 꼭 사고 싶은 선물을

고르길 바랐기 때문이었어요.


포켓몬센터에서는 물통과 키링을 샀어요.

한울이는 '이브이'를 가장 좋아하더라고요.

한울이는 물론 이것저것 다 사고 싶어 했지만

제가 3개만 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니

물건 하나하나를 고심해서 고르더라고요.

포켓몬 모자, 포켓몬 연필, 포켓몬 장난감 등

한울이가 갖고 싶었지만 놓아줘야 했던

물건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애절해 보였어요.

그렇지만 갖고 싶은 물건을 포기할 줄 알고

약속을 지키려는 모습이 대견하더라고요.

포켓몬센터에서 기념품을 2개만 산 이유는

지브리샵의 '토토로' 인형을 사기 위해서였어요.




일본에서 한울이는 '토토로'에 입덕했어요.

일본 여행하는 동안 한울이와 함께

「이웃집 토토로」를 2번이나 봤답니다.

아마도 한울이의 인생 첫 만화영화겠네요.

토토로 상영 시간이 1시간 28분이나 되는데도

한울이는 끝까지 집중해서 잘 보더라고요.

제가 고심해서 한울이에게 소개한 작품인데

한울이도 무척이나 재밌어했어요.

같이 여행하고 침대에 누워서도

토토로 영화 장면에 대해서 얘기할 정도로요.


한울이가 특히 재밌게 본 장면들이 있더라고요.

'동글이 검댕먼지를 만나는 장면'

'토토로와 같이 우산 쓰고 버스 기다리는 장면'

'도토리 싹이 자라도록 기원하는 장면'

'고양이 버스 타고 동생 찾으러 가는 장면' 등

한울이와 영화 속 대사와 행동을 따라 하다 보니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친구가 된 것 같더라고요.

「이웃집 토토로」가 1988년 제작된 작품인데

36년이 지난 지금도 유쾌하고 감동적이네요.

오랜 시간이 흘러도 폭넓은 나이를 아울러

사랑받는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고 또 고맙기까지 해요.

당신은 아직 토토로 영화를 안 봤을 것 같은데요.

나중에 시간 되면 한울이와 같이 한번 봐 보세요.


여하튼 그런 이유로 기념품 목록에서

토토로 인형을 빼놓을 수 없었어요.

지브리샵에 토토로 인형이 여러 개 있었는데

한울이가 2개 인형 사이에서 고민하더라고요.

하나는 크기가 커서 잠잘 때 껴안기 좋은 인형,

다른 하나는 크기는 작지만 더 예쁜 인형.

한울이는 결국 둘 중에서 못 고르겠는지

저한테 도움을 요청하더라고요.


한울 : "토토로 인형 2개 다 사면 안 돼요?"

아빠 : "하나만 골라 봐. 약속했잖아"

한울 : "그러면 하나는 제 돈으로 살 거예요"

아빠 : "엥?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한울 : "세뱃돈 받은 거 20만원 있어!!"

아빠 : "여기는 일본 돈으로 사야 하는데?"

한울 : "힝..."

한울 : "그러면 아빠가 카드로 결제해!"


결국 토토로 인형 2개를 다 사줬어요.

제가 봐도 둘 중에 고르기 어렵더라고요.

둘 다 너무 귀엽고 갖고 싶어서요.

게다가 큰 인형은 매장에 딱 하나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보내기 너무 아쉬운 거 있죠.

지브리샵 가격이 비싸기로 유명하지만

한울이의 인생 첫 영화 콘텐츠이기도 하고

일본에서 살 때 의미 있는 물건이기도 해서

그 비용이 아깝지는 않더라고요.

게다가 한울이도 무척 기뻐했고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토토로 인형 껴안고

토토로 노래 흥얼거리면서 왔네요.




사실 제가 진짜 가고 싶었던 곳은

포켓몬센터도 지브리샵도 아니었어요.

같은 건물에 만화 「원피스」 관련

굿즈를 파는 기념품샵이 있었거든요.

이번엔 기념품샵 앞에만 잠깐 들러서

루피하고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왔요.

'안녕. 루피. 다음에 형이 다시 올게'

라며 아쉬움을 남겨 놓고요.

당신도 알죠?

제가 「원피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지금이야 욕심을 억누르고 있지만...

언젠가 원피스 캐릭터 피규어를 모아서

집 안에 전시장을 만들어 놓고 싶어요.

아마 저 혼자 일본에 왔었다면

하루종일 원피스 관련 물건들을

찾아다녔을지도 몰라요. (하악 +_+)

이번에는 한울이를 위한 여행이니

제 욕심은 많이 내려놓았답니다.

그래도 행.. 행.. 행복해요.

전 아빠니까요. 하하하하하하하.




아참. 오늘 저녁 먹다가 한울이가

손등에 화상을 좀 입었어요.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는 식당이었는데

한울이가 집게 가지고 장난치다가

뜨거운 부분이 손등에 닿았다고 해요.

화상 부위가 작지는 않아서

급하게 응급처치를 해놓긴 했어요.

크게 흉 지거나 다치지 않으면 좋겠어요.

한울이는 다행히 괜찮다고 하네요.

이런 사고가 날까 봐 화내고 혼냈던 건데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인가 싶기도 해요.

여전히 제 마음은 속상하지만요.


이번 한울이와의 일본 여행도 끝이 보여요.

이제 이틀만 지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네요.

그동안 한울이 데리고 다니느라

매 순간 긴장하고 신경 쓰였는데

이제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있어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긴장하고 있을게요.

오늘처럼 한울이 또 다치면 안 되니까요.


내일은 한울이와 디즈니랜드에 갑니다!

도쿄에서의 여행 마지막 날이면서

가장 사람이 적은 날짜로 맞췄지요.

잘 다녀와서 또 소식 전할게요.

디즈니랜드는 저도 처음이라 기대되네요.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그럼 이만 줄일게요.


한울이와 친구가 된 남편이,




토토로 영화 속 한울이가 기억하는 주요 장면


이전 26화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10일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