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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차라떼샷추가 Oct 20. 2024

도쿄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6일차)

5살 아들과 아빠, 둘만의 일본 여행

평생 함께 여행하고 싶은 아내에게,


벌써 한울이와 여행 온 지도 6일이 되었네요.

한울이와 있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요.

특별한 하지 않아도 즐거움이 가득한 것이

꼭 신혼여행하고 비슷한 느낌이에요.

그저 상대방과 함께 있는 시간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그런 여행처럼요.

13년 전 당신과 보냈던 신혼여행처럼

한울이와 함께 한 이번 여행도 제 인생에서 

뜻깊고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그렇다고 질투하지는 말아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니까요.




오늘도 한울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이노카시라 공원 동물원에 다녀왔는데

평일이라 관람객이 많이 없더라고요.

덕분에 저랑 한울이가 전세 낸 것처럼

동물들도 관찰하고 여유롭게 관람했어요.

근처에 있는 지브리미술관도 다녀왔고

공원 운동장에서 캐치볼도 재밌게 했요.

특별히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루가 완성이 되더라고요.


한울이한테 가장 인상 깊었던 걸 물어봤어요.

한울이는 다람쥐길 걸은 걸 얘기하더라고요.

이노카시라 동물원에는 다람쥐들 우리 안에

사람이 들어가는 오솔길을 만들어 놓았어요.

오솔길 따라서 다람쥐 먹이통을 놓아둬서

다람쥐들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었답니다.

다람쥐들은 자기네 집인 걸 아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밑으로 머리 위로

후다다닥하면서 활발히 돌아다니더라고요.

한울이는 다람쥐를 쫓아 신나서 돌아다녔어요

"다람쥐야~ 어디 가?"라고 말을 건네면서요.

자유분방하게 뛰어다니는 한울이 모습이

해맑고 즐거워 보이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뿌듯했고요.


동물원에 있는 조각박물관도 관람하고 왔어요.

조각상들이 야외에도 설치되어 있었는데

표정과 몸짓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어요.

한울이는 그 조각상들이 웃기다고 생각했는지

조각상 보고 표정과 몸짓을 따라 하더라고요.

저한테 빨리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서요.

얘도 사진의 필요성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아요

순간이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도요.

한울이가 가장 좋아한 조각상은

'너 이놈!'하고 혼내는듯한 조각상이었어요.

조각상 따라서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면서

인상 쓰는 걸 따라 하더라고요.

이건 사진으로 보내줄게요. 한번 봐보세요.

사진 찍으며 저 혼자 킥킥대고 웃었답니다.

한울이 표정, 손짓, 앉은 자세를 살펴보세요.


동물원을 나와서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한울이가 지브리미술관에 가자고 하더라고요.

사실 이번에 제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사전 예약이 모두 마감되어서 표를 못 구했어요.

괜히 미술관 앞에 갔다가 아쉬움만 더 커질까 봐

지브리미술관은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한울이한테 말도 안 했었고요.

그런데 한울이가 먼저 가자고 하더라고요.

동물원 가는 길에 박물관 표지판이 있었는데

한울이가 여행책자에서 본 걸 얘기하더군요.

한울이한테 표 못 구했다고 설명을 했는데도

자기는 가고 싶다며 생떼를 쓰더라고요.

마침 어젯밤에 <이웃집 토토로>도 같이 봐서

한울이는 더 가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건물 외관만 보고 올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래도 같이 가보자며 다녀왔답니다.


지브리미술관 앞에 가면 아쉬울 것 같았는데

입장하지 못했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어요.

입장권 없이도 광장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광장 앞을 구경하고 있는데

토토로 인형이 입구 앞에 자리 잡고 있더라고요!

저와 한울이는 둘이 눈을 마주치고는

"우와!!!! 토토로다!!!!"라고 외치며 뛰어갔어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한테 부탁해서

토토로와 같이 인증샷도 찍었답니다.

지브리미술관을 관람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한울이와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남길 수 있어

충분히 의미 있는 발걸음이었어요.




당신은 논문 작업으로 정신이 없는데

저희만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논문 심사 앞둔 당신이 열심히 공부하듯

한울이와 정말 열심히 놀고 있답니다.

그게 제가 당신을 존중하 방식이

남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 믿으니까요.

한울이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아주고 있으니

당신은 걱정 말고 마음껏 논문에 집중해 주세요.

저희 돌아가면 당신한테 많은 사랑을 줄게요.

떨어져 지냈던 시간이 아쉽지 않도록.


이번 여행이 개인적으로는 아쉽기도 했어요.

모든 활동을 한울이한테 맞고 있으니까요.

도쿄에 머물 동안 저도 가고픈 곳들이 있었어요.

경험하고 싶은 전시음식들도 있었고요.

그렇지만 가슴속에만 묻어둘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원하는 걸 한울이와 즐기긴 힘들 테니까요.

아쉬운 마음에 한울이한테 속마음을 얘기했어요.

"사실 아빠는 일본에서 자전거 여행하고 싶었어!"

그랬더니 한울이가 의아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하면 되지~ 한울이도 자전거 타기 좋아해!"

"한울이 두 발 자전거 타면 그때 같이 올까?"

그렇게 한울이랑 일본에 다시 오길 약속했어요.

이번 여행이 어쩌면 시작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음에는 당신도 껴줄게요! 우리 함께 해요!




지금이야 제가 하고픈 걸 참아가면서

한울이를 위한 여행을 꾸려가고 있지만,

제가 나이 들면 상황이 역전이 되겠죠?

누군가에게 짐이 되기는 싫지만...

나이 들어서도 한울이와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그때는 한울이가 저보다 세상을 더 잘 알겠죠.

저한테 설명해 줄 것도 많아질 거예요.

한울이가 성인이 된 후에 저를 위해

그런 수고를 해줄지는 모르겠네요.

굳이 저를 위해 그러지 않길 바라면서도

그 마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게 참 모순적이네요.


그렇지만 한울이가 저랑 여행 안 가도 괜찮아요.

저한테는 당신이 있으니까요.

당신과는 늙어서도 손 잡고 여행 다니고 싶어요.

파리, 포르투, 피렌체, 바젤, 아비장, 릴롱궤 등

당신을 데려가고 싶은 곳이 많아요.

나이 들어도 저와 함께 해 줄 거죠?

당신과 함께라면 남은 제 인생에 어떤 순간도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라 믿어요.


오늘 편지는 이만 줄일게요.

당신이야말로 제 인생의 가장 큰 복이에요.

13년을 함께 살아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남은 기간은 제가 좀 더 잘할게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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