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어디서 오는가
나는 한동안 괜찮은 척하며 살았다.
힘들지 않다고,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정리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은 더 무거워졌다.
사소한 말에도 예민해졌고,
이유 없이 지쳤다.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반복되었다.
돌이켜 보니 나는 해결한 것이 아니라 미뤄두고 있었던 것이다.
불편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남는다.
의식에서 밀려난 감정은
무의식으로 내려가 다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짜증으로,
냉소로,
이유 모를 피로로.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하루인데
속에서는 계속 무언가가 부딪힌다.
그 충돌의 원인을 모를 때
사람은 더 불안해진다.
나는 그걸 오래도록 “성격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깨달았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똑바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설명만 했지, 인정하지는 않았다.
적기 시작한 건 그 인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트 위에서는 변명할 수 없다.
문장은 이상하게도 사람을 솔직하게 만든다.
‘사실은 화가 났다.’
‘그 사람이 부러웠다.’
‘나는 실패가 두려웠다.’
입으로는 하지 못한 말이 종이 위에서는 튀어나왔다.
적는 순간,
막연하던 감정은 형태를 갖는다.
이름이 붙는다.
문장이 된다.
이름 붙여진 감정은 이전과 다르다.
그전까지는 정체를 모르는 덩어리였지만,
이제는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적는다는 것은
감정을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무의식에 내려가 내 삶을 뒤흔들던 것들을 빛 아래로 꺼내는 일이다.
빛에 드러난 감정은 힘이 줄어든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나를 압도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때 처음 느꼈다.
문제가 절반쯤은 풀린 것 같은 감각을.
해결한 건 아니었다.
상황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본 감정은 더 이상 나를 안에서부터 흔들지 않았다.
적기 전에는
내가 감정에 붙잡혀 있었고,
적고 나서는
내가 감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나는 이제 안다.
적는다는 것은
마음을 정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숨기지 않는 태도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무의식의 그림자로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노트를 펼친다.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
숨기지 않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무의식의 그림자로 남지 않는다.
어쩌면 변화는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