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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May 01. 2023

결말을 아는 이야기를 봐야 하는 이유

드라마 <오월의 청춘>


우리의 삶은 대체로 리얼리즘(만)이 강조되는 밍밍한 다큐입니다. 가아끔 추태를 동반한 시트콤을 찍기도 하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슬로우가 걸리는 로맨틱 코미디나 격정 멜로를 찍는 러닝 타임은 그리 길지 않죠. 인생에서 몇 안되는 특별한 순간임을 감지한 뇌는 그야말로  풀가동을 해 그 장면을 생생하게 찍어둡니다. 도로 위로 부서지던 햇살과 공기 중에 흩날리던 꽃가루, 만물이 깨어나는 듯한 냄새까지 떠오르게 하는 최첨단 영상을요. 



그해 오월, 명희와 희태에게는 그런 장면이 유독 많았을 겁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로맨틱 코미디의 전통을 훌륭하게 따르고 있어요. 독일 가는 비행기 표가 필요한 명희가 친구 수련의 대타로 맞선에 나가면서 희태를 만나게 됩니다. 떼어내려는 여자와 다가가려는 남자의 밀고 당기기가 시작되죠.


1980년의 로맨스는 마음을 살살 간질이는 구석이 있더군요. 함께 의자에 앉아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든가, 헤어지는 길에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 귀걸이와 넥타이를 교환한다든가. 아마 ‘그 오월이, 여느 때처럼 볕 좋은 오월이었더라면’ 두 사람은 먼 훗날 그날의 온도와 습도가 어땠는지까지 자식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양말을 뒤집어 벗어두는 등의 사소한 문제로 투닥거리면서요.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압니다. 80년 오월의 광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의 장르가 비극으로 바뀌어버릴 것이란 사실을요.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if~’로 시작하지만, <오월의 청춘>은 유독 ‘그러지 않았더라면’을 되뇌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동시에 여전히 밀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남겨진 이들에게 그 모든 가정과 후회 역시 당신의 사랑이라고, 그러니 끊임없이 그해 오월로 떠내려가더라도 다시 만나는 날까지 잘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려 깊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결말을 다 아는 이야기, 마음만 아플 뿐인데 왜 봐야 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이 그토록 허무하게 부서져 버린 것을 잊어선 안 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삶이 비극이길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남의 비극에는 곧잘 무뎌지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드니까요. 비극을 그저 ‘소비’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그 무거움에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요. 그때 누군가의 세심한 시선을 빌린다면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지나간 시대의 비극이라고 흘려보내기엔 책임지지 않은 자들과 규명하지 못한 것들이 여전히 많은 까닭입니다. 지난해 5월, 5·18조사위는 발포 최고 명령자와 70여 명에 이르는 행방불명자들의 신원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 사건 46건 역시 아직 조사 중이라고 해요. 오는 12월 26일,  5·18조사위의 임기가 종료됩니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80년 오월 광주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월의 청춘>을 통해 우리가 수많은 명희와 희태의 삶에 대해 감히 상상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너무 멀지 않은 날에 그해 오월의 이야기가 완전히 매듭지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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