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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Gray Oct 23. 2023

박사과정이 진짜 다른 일들보다 더 힘들까

작년 10월, 박사 1년차에서 2년차 넘어가던 시기에도 한달 간 마음에 폭풍이 일며 방황을 했었다. 올해는 그래서 조심 또 조심하자고 여러 예방책을 세웠건만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10월 한달 또 방황하며 보내고 있다. 그냥 이제는 10월의 방황을 연례 행사로 여기기로 했다. 


방황의 시기에 내가 보이는 특징이 몇 가지 있다. 


하루 12시간 이상 과하게 자거나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하루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바깥에 나가지 않는다. 햇볕이 밝은 날은 더더욱 커튼을 치고 어두운 공간에 있으려고 한다. 

음식을 대충 먹는다. 뭘 해먹거나 사먹을 의지가 없으니 대충 맨 속에 커피만 들이킨다. 

부쩍이나 밤 시간에 외로움을 탄다. 어두운 밤풍경을 멍하니 쳐다보는 시간이 길다. 

연구든 일이든 뭐든 하지 않는다. 머리로는 해야 할 일 리스트가 무한 반복되고 있지만 정작 워드파일 하나 켜는 것조차 짜증이 나고 싫다.


10월이 가장 두드러지게 방황을 하는 시기라 그렇지, 사실 10월 말고도 5월 즈음에도 방황이 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게 박사과정 학사년도의 시작과 끝 시기에 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10월은 박사 연차가 올라가는 학사년도 기간이고, 이듬해 5월은 지난 1년 간의 결과를 평가받는 시기이다. 그래서 이 시작과 끝 시기에 주로 우울한 감정이 강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박사과정은 왜 주기적인 우울을 동반할까?


첫째, '독립적 연구자'라는 박사과정 자체의 특성에 기인한다.

박사과정부터는 한 명의 독립적인 연구자로 자기 연구를 해나가야 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마이크로매니징을 특별히 선호하는 교수가 아닌 이상, 지도교수도 박사생의 연구에 대해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 지도교수는 옆에서 조력을 할 뿐이다. 사회과학계열은 특별한 코스워크나 RA, TA 등의 추가적인 업무가 있는 경우가 아닌 이상 연구실에 매일 출근해야 할 의무도 없다. 자기 연구에 대해서도 어떠한 가이드라인도 없는 사실상 무한한 자유를 갖는다. 심지어 박사기간도 3년, 4년, 5년 계속 늘어나니 주어진 시간도 무한정인 것만 같다. 이 말은 자기 연구에 대해서 박사생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내가 지금 연구를 잘하고 있는 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건가? 혹시 내가 틀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이렇게 어려운 졸업논문을 쓸 수는 있을까? 이렇게 해서 졸업은 할 수 있을까? 졸업을 못하면 어떻게 해야하지? 졸업을 하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해야하지? 졸업 후 취업하는 데에 내가 지금 하는 연구가 도움이 되는 걸까? 등등 무수한 불안감이 생긴다.



둘째, 박사과정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동반한다. 

연구 외적으로도, 박사과정생들은 대부분 생활고에 허덕이는 경우가 많다. 유학생들의 경우, 장학금이나 스타이펜드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 지원을 받는 경우들도 있지만 금액이 충분하지 않고, 그마저도 정해진 기간이 있어서 그 뒤로는 알아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박사과정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연령대가 많은데 이 시기에는 주변 또래들 대부분이 사회에서 어느정도 기반을 잡아가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쉽게 비교의식이 생기기 마련이다. 또 결혼할 시기에 가까운 연령대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신혼집 마련 이야기, 주식 투자 이야기, 연금 이야기 등등을 듣고 있노라면 나만 사회에서 동떨어져 여전히 학생에 머물러있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셋째, 박사과정 이후의 진로에 대한 불안함이 있다.

박사과정은 어떤 직업적 보장을 해주는 자격증도 아니고, 회사 취업으로 직결되는 자리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박사과정 내내 졸업을 못했을 때의 삶 또는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특히 사회과학계열 박사생들의 경우 취업 시장에서 훨씬 입지가 좁기 때문에 진로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크다. 박사과정 동안 배우는 일들이 취업전선에서 쓸모없는 것들이라던지, 겨우 쓸모를 할 수 있는 자리는 매우 한정적이라던지 등 현실적인 고민을 하다보면 지금 당장 하는 연구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다보면 크나큰 기회비용과 정신력을 소모하여 박사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해도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다는 억울한 기분에 휩싸인다. 


이 길 끝에 희망이 있다면 현실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이겨내겠지만 혼자서 모든 일을 책임지고 해나가야하면서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궁핍하게 연구를 이어가야 하니 박사과정생은 본질적으로 우울과 자조를 동반하기 쉽다. 



그렇다고 박사과정이 다른 일들보다 진짜 더 힘들까?


나는 오랫동안 고시생이었고 장기취업준비생이었으며 인턴이자 회사원이었으며 자영업자였다. 그래서 박사생이 다른 모든 일들에 비해 힘들다고 하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라고 본다. 각자의 자리에는 각자의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박사과정에서 느낀다는 위의 어려움들은 사실 고시생 때도, 취업준비생 때도, 인턴 때도, 회사원 때도, 자영업자였을 때 크고 작게 느꼈던 어려움들과도 같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그리고 모든 자리는 그 자리에 수반되는 일들로 인해 모두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남의 고통으로 나의 고통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나 혼자만 힘들고 괴로운 게 아니라는 걸 알게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기도 한다. 



단테 이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칭송받는 이탈리아의 시인 자코모 레오파르디는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에 재산이 많아 놀고 먹으며 시를 썼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선천적으로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미친듯이 그리스어 번역일을 하여 시인의 삶을 이어갔다. 그 이전 로마의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문예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시인의 삶을 이어갔는데, 이에 에코는 "궁정에 가서 영주의 기분을 염탐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두 위대한 시인의 속사정이 N잡을 뛰면서 박사과정을 이어가거나, 펀딩을 대주는 교수나 기관의 눈치를 살피며 박사를 이어가야하는 박사과정생들의 그것과도 같아서 어쩐지 웃음이 난다.


문학계의 거성들도 이런 삶을 살아온 역사를 보니, 박사생들이 삶에 그리 억울해 할 것도 아닌 듯 싶다. 주기적인 우울이 오면 오는 대로, 이리 저리 흔들리다 보면 어느샌가 목적지에 와닿아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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