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 3년차에 들어서면서 연구와 졸업에 대한 압박이 점점 심해졌다. 특히, 벌써 3년차가 되었는데 아직까지 내 연구 주제, 문제 의식이 클리어하지 않은 것 같고 분석에 필요한 스킬셋도 부족하고 이론적인 정리도 모자른 것 같다는 자괴감이 들어 스트레스가 심했다. 또 하루종일 좌식생활을 하고 눈이 빠져라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으니 체력이 하루하루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주말이면 거의 하루종일 두문불출하고 잠만 자는 것도 고치고 싶은 패턴 중 하나였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취약해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던 와중, 연구실 친구들의 권유로 러닝클럽에 합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침에 모여 5km, 7km 뛰는 게 목표였는데, 조금씩 조금씩 하다보니 올 3월에 열리는 하프 마라톤대회에도 함께 출전하게 되었다.
사실 마라톤 대회를 목적으로 하기 전까지는 그다지 열심히 뛰지 않았다. 애초 3km조차 제대로 뛰지 못하는 수준이었어서, 친구들 쫓아가기만으로도 벅찼다. 내가 너무 느리니까 앞서 가던 친구들이 몇 번을 앞에서 기다려주곤 했다. 그러니 다른 친구들한테 항상 민폐를 끼쳤다. 그러던 내가 어느새 마라톤 대회 2주를 앞두고 있다.
유튜브나 블로그에 보면 '초보러너 마라톤 후기', '초보러너 러닝 후기', '초보러너 경험' 등등 자신이 초보임을 강조하는 러너들이 많은데, 처음에 그들 후기를 보고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모른다. 아니 5km에 6:00 페이스로 뛰면서 초보라고 하고, 10Km에 7:00 페이스 뛰면서 너무 느린 초보라고 하고... 도대체 나 같은 초보 중의 초보의 경험담은 어디서 구해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나처럼 3km조차 한번에 못 뛰어서 중간에 쉬었다 뛰고, 평균속도 8:30 이상으로 거의 '빨리걷기' 수준으로 뛰는 왕초보들을 위해 나의 경험담을 풀어보고자 한다.
1. 처음 러닝을 시작했을 때
처음 러닝을 시작했을 때 내 수준은 앞서 말한 것처럼 8:30 페이스로 3km를 한번에 못뛰는 정도의 극악의 실력이었다. 어릴때부터 숨차고 땀나는 유산소 운동을 죄다 싫어했는데 그 중에서도 달리기, 특히 오래달리기를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유산소운동을 견딜 근력, 근지구력, 마인드셋 전부 다 꽝이었다. 그래도 일단 3km를 쉬지 않고 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속도는 신경쓰지 않았다. 옆에서 빨리 걷는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는 수준이라고 해도 일단 쉬지 않고 뛰었다. 그리고 나서 5km를 쉬지 않고 뛰었다. 역시 속도를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 쉬지 않고 5km 뛰는 것에 성공했을 때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심박수가 170까지 치솟았는데, 숨을 엄청 헐떡거리고, 뛰면서 코로 숨쉴 때마다 콧구멍이 찢어지게 아픈 것 같고, 목에서도 피맛이 나는 것 같았다. 다리 아픈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나는 심지어 팔도 아팠다! 어찌나 운동을 안한 몸인지 조깅을 할 때 팔을 직각으로 굽히고 뛰는데 그것조차 견딜 근력이 없어서 팔 근육이 땡겼다.
2. 러닝에 조금 익숙해졌다
이렇게 5km에 익숙해지는 데 한달 정도 걸렸다. 나는 대략 일주일에 2~3번 정도 뛰었는데, 첫 한 달 정도는 3km, 5km, 그리고 가끔 길게는 7km까지 뛰었다. 이 7km 뛰는 데도 여전히 속도는 8:10에서 8:30 정도로 8분대를 못 벗어났다. 그래도 7km까지 한 번에 뛰게 되니 내가 그래도 조깅을 할 수는 있는 사람이라는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7km를 한번 깨고 나니 그 뒤로는 3km 조깅에 대한 부담감이 확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신기한 현상인데, 지금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지만 한번 나의 한계점이라고 생각되는 목표치를 도달하고 나면 그보다 더 짧은 키로수를 뛰는 게 갑자기 아주 쉬운 수준으로 변해버린다.
3. 러닝 3개월 후
이렇게 한달 간 트레이닝을 한 후 7km를 깨고, 3km를 아주 쉬운 수준으로 느끼게 되면서 그때부터는 하프마라톤 준비를 위해 롱런에 도전했다. 첫 롱런은 7km에서 딱 1km 더한 8km였는데, 7키로를 뛸 때랑 8키로를 뛸 때가 좀 달랐다. 그냥 멘탈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이렇게까지는 못 뛸거 같은데', '하다가 포기할 것 같은데', '이건 너무 힘들 것 같은데' 등등 8km의 롱런을 한다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한 두번은 8km를 목적으로 했지만 6km, 5km 정도에서 포기해버렸다. 그러다 속도를 지금보다 더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제발제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만 한번 뛰어보자라는 생각으로 8km를 처음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신기하게도 속도를 더 늦춘다고 늦췄는데 실제로는 평균속도 차이가 거의 없었다. 롱런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경험을 하고나니, 그 뒤로 10km, 12km, 13km에도 똑같이 같은 방식을 적용하여 일단 끝까지 뛰고 본다라는 생각만 지키고 뛰면서 점차 키로수를 늘려갔다.
4. 현재
현재 나는 러닝을 시작한 지 4개월 정도 되었고, 최대 15km를 평균속도 7:40 정도로 뛴다. 애초에 속도를 빨리 내겠다는 목표를 가져본 적이 없는데도 뛰다보니 자연스럽게 8:30 페이스로 뛰던 속도가 7:30 언저리로 빨라졌다. 나처럼 왕초보라면 아예 러닝의 '속도'에 대한 개념은 지워버리길 바란다. 그보다는 아주 천천히 뛰더라도 걷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여 롱런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깨는 게 우선인 것 같다. 이렇게 키로수를 점점 더 늘려가다보면 이 전에 뛰던 키로수들이 점점 더 쉽고, 짧게 느껴지면서 부담감이 줄어든다. 그렇게 부담감이 줄어들면서 짧은 키로수를 뛸 때는 예전보다 자연스럽게 속도가 붙게 된다. 난 이제 5km는 너무 가벼운 조깅 정도로 느껴지고, 10km 정도 뛰어야 몸이 개운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 하하!
물론 처음부터 기초체력이 좋아서 잘 뛰는 애들이 있다. 나랑 같이 러닝클럽 하던 친구들은 첫날부터 7km를 6:30 페이스로 뛰었다. 심지어 이전에 한번도 뛰어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말이다. 주의할 점은 왕초보가 너무 과욕을 부리면 반드시 부상이 온다는 진리다. 그렇게 뛰던 친구들 중 2명은 무릎과 발목 부상으로 결국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니 절대로 다른 사람들, 유튜버들, 블로거들이 7:00, 6:00 뛰면서 자기는 초보라고 한다한들 그걸 기준으로 삼아서 과욕을 부려서는 안된다.
5. 4개월차 초보러너가 느낀 러닝효과
러닝, 마라톤의 장점은 여기저기 마라톤 예찬론자들을 통해 아주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4개월차 초보러너로서 단기간 동안 느꼈던 러닝효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신체적 변화>
헬스나 필라테스, 요가 등에 비해 러닝 전후 여성의 신체 변화를 이야기하는 경험담이 잘 없는 것 같아서 먼저 내가 짧은 기간 겪은 신체적 변화을 공유해보려고 한다. 나는 BMI 수치 정상범주에 속하고, 상체는 굉장히 마르고 뱃살, 옆구리살은 없으나 하체가 튼실하여, 카톡 어피치 얼굴마냥 아래로 축 처진 엉덩이, 두꺼운 허벅지, 굵은 종아리의 전형적인 A형 체형을 가졌다. 중학생 때부터 오리궁뎅이, 무다리 등등 놀림을 많이 받았어서 어떻게든 없애보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잘 안됐었다. 그래서 이 체형은 평생 달고 살아야하려니 하고 그냥 살았다. 근데 조깅을 4개월쯤 하고나니 지금은 축 쳐졌던 엉덩이에 탄력이 생기고, 엉덩이와 허벅지를 잇는 사이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군살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눈에 띄게 바뀌지는 않았으나 종아리 역시 보다 매끈해졌다.
또 한가지, 생각지도 못한 신체적 변화라 하면 높은 심박수에 견딜 수 있는 심폐지구력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특히 나는 발표 때만 되면 긴장을 너무하고 심장이 요동치고 목소리가 떨리는 전형적인 염소러인데, 높은 심박수에 신체가 자주 적응하는 훈련을 하다보니 발표 시 긴장을 덜하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발표 시 긴장은 똑같이 하지만 예전보다 금방 진정을 하고 평정심을 찾게 되었다. 즉, 러닝을 하게 되면서 높은 심박수에 따른 신체변화에 금방 적응하고 이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난 요즘 큰 발표를 앞두면 일부러 최대심박수를 폭발적으로 높이는 스프린트를 한다.
체력 자체가 좋아진 것 같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장시간 집중해서 일을 하면 여전히 피곤하고 가끔은 운동도 하기 싫을 때도 많다. 그래도 이 상태 꾸준히 오랫동안 하면 소위 말해 피통이 서서히 커지지 않을까 싶다.
피부는 확실히 좋아졌다. 땀을 많이 흘리면서 피부결 자체가 부드러워졌고, 무엇보다도 혈색이 아주 좋아졌다. 예전에는 얼굴에 핏기가 없고 칙칙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볼터치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볼에 옅은 홍조가 도는 것처럼 혈색이 개선되었다. 나는 주로 야외 러닝을 하기 때문에 자외선과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그래서 관리를 소홀히 하면 오히려 피부가 나빠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조깅 전후로 보습을 꼼꼼하게 해주고 선크림도 잘 바르고 뛰긴 하지만 이런 환경요인을 100프로 차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완벽하게 깨끗하고 보존된 피부를 위해서는 바깥 운동은 최대한 안하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
<심리적 변화>
신체적 변화보다도 심리적 변화가 더 극적이다. 러닝이 우울증 개선에 좋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는데, 왜 다들 그렇게 말하는 지 내 경험에 빗대어서 좀 더 자세히 파헤쳐보겠다.
먼저 생각하는 방식이 명료하고 깔끔해졌다. 나 같은 경우에는 우울한 기분이 드는 이유가 일단 생각이 너무 과해 결론 격에서 쉽게 우울한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생각이 너무 많으니 고민도 많고 사람이 가라 앉는 것이었다. 러닝, 특히 롱런의 마라톤을 하다보니 이런 식의 생각의 고리를 깔끔하게 매듭짓는 게 가능해졌다.
오랫동안 러닝을 하면 지루하기 때문에 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뛰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몸이 너무 힘드니까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진다. 그 귀찮아지는 순간에 '에라이 모르겠다'라는 심정이 확 든다. 그러면서 생각이 부정적인 결과로 연결되는 고리가 끊기게 된 것 같다. 요즘은 어떤 고민이나 큰 일이 있거나 답답한 심정이 들면 일단 뛰고 본다. 뛰다보면 알아서 생각이 정리가 되고 일정 수준에서 스탑 된다. 머리를 짓누르는, 안개 속에 휩싸인 듯한 불명확한 생각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경우들이 많았는데 러닝을 하고 난 뒤로는 그런 생각들이 많이 사라졌다.
자기효능감, 그리고 자기통제력이 커진다. <아비투스> 책에 보니, 상위 1퍼센트 경영자들 중 마라톤을 하는 사람이 10명 중 4명이라던데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상위 1퍼센트들이 자기통제를 트레이닝하는 방법을 나도 동일하게 할 수 있어서 좋다. 마라톤은 자기 자신과 싸운다. 한달 전의 나, 일주일 전의 나, 어제의 나 녀석이 뛴 것에 비해 아주 조금 더 성장하는 지를 체크하는 종목이다. 마라톤에서 남들보다 더 빠르게 치고 나가겠다 라는 결심이 전혀 소용이 없는 게, 자기 페이스를 잘 조절하지 않으면 완주 자체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나처럼 경쟁 상황에 취약한 인간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스포츠다. 그래서 남의 페이스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개똥철학 같지만, 뛰면서 인생에 대입되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마라톤을 하면서 인생을 배운다고들 하는데 나는 정말 동의한다. 내가 뛰면서 몇 가지 느꼈던 교훈들을 적어본다. 초보러너가 느낀 것을 적은 것이니 고수님들은 조용히 비웃어주셔도 된다...
- 초반부터 꾸준하게 열심히 뛰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막판에 스퍼트를 반짝 올려봤자 평균속도는 단 몇 초도 단축되지 않는다.
- 자기 페이스를 지키지 않고 남들 뛰는 대로 빨리 뛰려고 하다간 완주를 못한다.
-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하면 반드시 나중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되어있다.
- 높은 목표라 하여 너무 겁을 먹으면, 뛸 수 있는 거리도 못 뛰게 된다.
- 10km 뛰는 게 나의 최대치야, 라고 정하는 순간 그 이상 못 뛰게 된다.
- 뛰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항상 오는데, 그럴 때마다 아 일단 1km만 더 뛰고 결정하자 라고 생각하다보면 어느새 완주해있다.
- 포기하고 싶은 굴뚝 같은 마음을 참는 게 제일 어렵다. 근데 그 구간을 꾹 참고 넘어야 더 멀리 갈 수 있다.
- 포기하고 싶을 때는 일단 생각을 비우고 몸만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게 제일 낫다.
- 개 고통스럽게 뛰고나면 인생에 행복한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