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아, <봄, 태업>
쓰는 일을, 읽는 일을
게을리해도 아무도 벌하지 않고
생각을 중단해도 누구 하나 위협하지 않는
더러운 책상 앞
(…)
일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 정한아, <봄, 태업> 중에서
누구도 내게 글을 쓰라고, 글을 읽으라고 시키지 않았다.
읽기를 게을리 하고, 쓰기를 게을리해도 누구 하나 벌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말했다.
"당신이 글을 써야하는 이유를 찾아보십시오."
나는 왜 글을 읽는가.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왜 글을 쓰고자 하는가.
나는 왜 글을 쓰지 못하는가.
다시, 나는 왜 글을 읽는가.
어떤 이는 말했다.
당신은 글쓰기를 사랑했지만 글 쓰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즐겁고 행복한 기억보다는
고통스럽고 괴로운 나날들뿐이더라고.
매 순간 마치 신병에 걸린 사람처럼 앓으면서 글을 썼다고.
그럼에도 쓸 수 밖에 없었다고.
글이란 무엇일까.
내게 글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강가에 버려진 이름 모를 이의 시체 같은 것.
무언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아무도 모르게 두둥실 떠오른 시체 한 구.
나는 그것을 봐버렸고 처음에는 그것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머지 않아 마음이 묶여버렸다.
그것을 외면할 수 없어서 모른 척 등 돌릴 수 없어서 결국 그것을 살피고 들여다본다.
그것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은 나의 목소리가 되기도 창문 너머 걸어가고 있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되기도 푸드코트 구석에 홀로 앉아 무심한 눈빛으로 배를 채우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되기도 누군가의 발길에 무참히 무너져버린 연약한 눈사람의 목소리가 되기도 무거운 머리 위에 잠시 머물다 간 구름의 목소리가 되기도 내 오랜 타인 엄마의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나는 시체를 바라보다 시체 곁을 맴도는 옅은 그림자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선명한 육체보다 어른거리는 빛의 흔적이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나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또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저 강가 위에 무력하게 떠 있는 시체일지 모른다고.
시체들을 가슴에 품고 사는 강일지 모른다고.
죽은 것들 죽어가는 것들 이미 죽어 사라져버린 것들
그들 속에서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당신에게 글이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온다면
그때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내게 글이란,
아침 산책 길에 만난 들풀이 뿜어내는 빛을 발견하는 일이에요.
무언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 홀로 고요히 빛나고 있는 작은 것.
그것의 기쁨에 대해
그것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그것의 찬란함에 대해
그것의 충만함에 대해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쓰고 있는 그런 거 말이에요.
살아있는 것들 살아 숨쉬는 것들 살아 반짝이는 것들.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것에 대해 말하면서도 가슴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죽은 것들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넓고 깊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넘실대는 물결에 몸을 맡긴 채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