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로버트 레드포드
“왜 이렇게 울어. 브래드피트 죽은 게 그렇게 슬퍼?”
“너는, 글 쓴다는 사람이.”
사랑은 둘 중 하나의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을까? 행복하고 평온해서 덩달아 미소가 번지거나 곁에 다가가 어깨를 감싸주고 싶은 위태로움. 사랑하므로 이미 애틋해져 버린 마음 때문에 가만한 상태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 위태로워 보일 때 우리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심경에 빠진다. 그런데 그 뭐라도가 뭔지 모르겠을 때, 혹은 알지만 상대방이 내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아 다시 주머니로 돌려놓아야 할 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어쩔 도리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한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의 등을 보는 내내 애타고 애닯고 무력하고 자책하는 마음들을 비벼 먹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평생토록.
어떤 영화는 누군가의 위태로움을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자극적인 방식으로 묘사한다. 어떤 영화는 위태로운 누군가를 긴긴 시간 동안 응시하는 눈길을 정성껏 묘사해서 사실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둘 모두 사실적이라는 건 동일하지만 전해지는 메시지는 반대로 향할 수 있다.
낚싯대를 잡은 폴의 손끝과, 시선,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낚싯줄이 출렁이는 모습을 천천히 또 가까이 담는 것 만으로 영화는,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영화는 바로 이런 영화입니다’라고 말한다.
눈길에도 온도가 있다고 믿는다. 사랑과 사람을 향한 로버트 레드포드의 눈길은 안겼을 때 포근해서 잠이 드는 그 정도가 아닐까.
“그러니까 울지 않을 수가 없잖아.”
“맞네.”
“이제 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