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란 무엇인가 1>을 읽고
# 2017년 1월에 쓰인 글입니다.
# 글에 쓰인 '씀씀이'모임은 2018년 6월 기준, 독서모임 트레바리의 '씀'이라는 클럽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7년 1월. 다시 읽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씀씀이’라는 글쓰기 모임을 열었습니다. ‘씀씀이’를 시작할 거라고 하니 주변에서 묻습니다. “경제 모임이야?"
사전 찾기를 좋아합니다. ‘씀씀이’를 검색해보니, ‘돈이나 물건 혹은 마음 따위를 쓰는 형편. 또는 그런 정도나 수량.’이라고 합니다. 친구들의 말이 맞았어요. 씀씀이는 ‘크다, 헤프다’라는 뒷말이 먼저 떠오르는 단어였어요.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바람은 '왜 잘 쓰고 싶을까?'에서 글을 쓰면 대체 뭐가 좋길래, '왜 쓰는가?'로 옮겨갔습니다.
1. 내 생각을 더 정확히 알고 싶어서.
2. 생각을 정리하고 정돈하고 싶어서.
3. 보고, 듣고, 맛보고, 경험한 느낌들을 흔적으로 남기고 싶어서.
결론: 나를 위해서
이쯤 되니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들의 글 쓰는 마음이 궁금합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을 집었습니다.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문학잡지’라며 타임지가 극찬한 <파리 리뷰>의 작가 인터뷰를 엮은 책. 많은 인터뷰들 중에서도 소설가들의 소설가라 불리는 거장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 <작가란 무엇인가>. 300여 페이지로 구성되는 보통의 소설보다 다소 두꺼운 책을 덮을 때쯤 세 가지 정도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글쓰기는 질문 하는 행위이다.
인터뷰 속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쓰는 글의 결론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최초에 생각했던 결말과 다르거나 심지어 작가 스스로도 결론이 궁금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고도 했습니다. 하루키는 <깊은 잠>을 쓸 때 자신도 누가 범인인지 몰라서 그걸 알아내기 위해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살인자가 누구인지 안다면 이야기를 쓸 필요가 없다면서요. 내 안에 왜 <속죄>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을까? ‘키치'란 무엇일까? 등 스스로 던진 질문에 여러 등장인물을 두고 그들의 시선과 입장으로 질문을 되새기며 답안지를 써 내려가는 거죠.
결국 글쓰기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인가 봅니다. 쓴 글이 수필의 형식을 띄건, 이야기를 입혔건, 시의 형식을 취했건 간에요. 제가 지금 '왜 쓰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요.
둘째,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좋은 질문을 한다.
인터뷰를 엮은 것만으로도 책이 되다니. 전문 인터뷰어는 역시 달랐습니다. <작가란 무엇인가>의 질문들은 너무나도 좋았어요. 특히 헤밍웨이를 인터뷰한 조지 플림턴의 질문이 인상 깊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창조적인 작가로서 예술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사실 그 자체보다는 사실의 재현을 선택하셨나요?”
이 뒤를 잇는 헤밍웨이의 답은 더 기가 막히죠.
“왜 그런 것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나요? 일어난 일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알고 있거나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재현이 아니라 창작을 통해 살아있는 어떤 것보다 더 진실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요. 당신은 그것을 살아 있게 할 수 있고, 만일 당신이 충분히 잘할 수 있다면 그것에 영원성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유이고 우리가 아는 한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명망 높은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모두 좋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질문이 좋은 생각을 이끌어내죠.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를 주는가?'라는 좋은 질문이 없다면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과 같은 단편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좋은 질문을 많이 품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파리 리뷰>의 Interviewer가 좋은 질문을 만들기까지, 윌리엄 포크너가 좋은 질문을 품고 만인에게 읽히는 글을 쓸 때까지 스스로 Interviewee가 되어 수많은 질문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저도 좋은 Interviewer이고 싶습니다.
셋째, 좋은 질문은 안에서 밖으로 향한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으로 널리 알려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친구들을 위해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어머, 에코 씨? 제가 바로 그 사람이에요. 나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 머리가 댕강 울렸습니다. 다시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해놓고 나만을 위한 글을 쓰고 있었으니 무슨 공감을 받고 다시 읽고 싶겠어요.
어린아이의 서툰 동시가 극찬을 받기도 하는 반면에 통찰력 있고 잘 다듬어진 저널이 대중의 외면을 받기도 하지요. 두루 칭찬을 받는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항상 주변 사람들의 소식과 의중을 궁금해합니다. 내 이야기만 하는 친구는 어쩐지 피곤해요.
대 작가들도 그랬습니다.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안타까움에 공감하기 위해. 복잡한 머릿속과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하나같이 누군가를 위해 글을 썼습니다. 심지어 마르케스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모두를 위해 썼다고 했어요. 그래서 소설책 머리말이나 저자 후기를 보면 도장으로 찍어낸 듯 쓰여있었나 봐요.
…한 시대의 …한 …를 위해 이 책을…
으례적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뻥이 아니었어요.
허무한 결론이지만 글 속에 글 쓰는 사람의 마음이 비칠 수밖에 없습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미 있는 질문을 이끌어내고, 애정을 담은 잔잔한 질문으로 마음의 한 획을 긋는 답을 찾도록 돕는 것. 상대방에 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입장을 헤아리는 것. 그리고 더 행복하기를 염원하는 마음. 글 쓴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고스란히 와 닿는 거지요.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이렇게 많은 텍스트를 쏟아낸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요즘 사람들 책 안 본다, 글 안 읽는다 우려의 목소리가 크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문자를 통한 소통이 활발한 시대입니다. 전화보다 문자가 익숙하고 SNS며 블로그, 사회적 담론도 글과 댓글로 이루어지죠. 출판시장이 불황이라고 해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서적, 논문, 마니아 층을 꽉 잡고 있는 취미서, 책의 기본인 이야기와 수필 등 역사상 가장 많은 활자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쓰는 게 큰 덕목 중 하나라 의심치 않습니다.
아직 욕심이 많고 마음 씀씀이가 좋지 못해 당분간은 저를 위한 글쓰기를 계속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며 마음 씀씀이가 좋아야 좋은 씀씀이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애좀 써 봐야겠습니다.
씀씀이가 그래서 씀씀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