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테크가 만든 아날로그 가치의 역설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의 졸업연설에서 3가지 이야기를 했다. 그중 하나는 "Connect the Dots"이다. 잡스는 인생의 경험을 연결하는 것이라 했지만 그보다 더 디테일한 수준에서도 경험과 관찰을 연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인지 깨닫고 있다.
1.
작년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주제는 바로 디지털노마드였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한 도유진 님의 <One Way Ticket> 다큐멘터리가 그 출발점이었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다큐멘터리의 이야기는 <디지털노마드: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갈 자유>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 책은 밀레니얼 세대에서의 디지털이 우리의 라이프스타일과 커뮤니케이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사례와 인터뷰 중심으로 다룬 재미있는 책이었다.
2.
기술 혹은 사상이라는 측면에서 최근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블록체인이다. <비즈니스 블록체인>이라는 책을 통해 블록체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제는 논문이나 기술적인 디테일까지 찾아볼 만큼 빠져들게 되었다.
3.
몇 주전 수강 중인 BP음악산업아카데미에서의 특강 주제는 레코드판 즉, LP였다. 국내 유일의 LP 프레싱 공장이자 제작사인 마장뮤직앤픽처스 하종욱 대표가 '하나의 비전과 가치로서의 아날로그 음악, LP'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언뜻 보면 크게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세 가지 주제는 사실 많은 연관성과 대비되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내 관심사의 연결에 방점을 찍은 것은 다름이 아닌 데이비드 색스의 새로운 책,
<아날로그의 반격, The Revenge of Analog>이다.
1. 레코드판: 스마트폰을 탈출한 미래 세대의 음악
2. 종이: 가장 오래된 제품의 새로운 미래
3. 필름: 로모그래피와 인스타그램이 말하는 것들
4. 보드게임: 네트워크 바깥의 네트워크
5. 인쇄물: 무겁기 때문에 무게 있는 이야기
6. 오프라인 매장: 알고리즘이 말하지 못하는 것들
7. 일: 로봇을 대체한 노동자들의 이야기
8. 학교: 아이패드가 교사를 대신할 수 있을까?
9. 실리콘밸리: 낮에는 코딩, 밤에는 수제 맥주
LP 혹은 바이닐이라고 불리는 레코드판은 아날로그적인 경험의 극치를 주는 물건이다. 우리는 스포티파이, 애플뮤직 그리고 멜론이 지배하는 음악 스트리밍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레코드 시장은 지난 몇 년간 엄청나게 성장해왔다. 음악을 저장하는 매체로서의 LP의 가치는 이미 CD가 시장에 나온 이후 그 위상을 대부분 빼앗겨버린 지 오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튠즈로 대표되는 음원 다운로드 시장과 스트리밍의 등장으로 더 이상 설 곳이 없다고 생각된 바로 그때부터 레코드판 시장에서의 반격은 시작되었다.
10년 전, 글로벌 LP 매출액은 약 500억 원 수준. 하지만 지금은 1조 1천억 원 수준으로 무려 20배 이상 성장했다. 미국의 경우 2007년 약 99만 장의 판매량을 보이던 것에서 2015년을 기준으로는 1,200만 장을 넘어섰고 연간 20%가 넘는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2015년 LP판매는 전체 음악 시장 수익의 25%에 가까워졌다.
레코드판 시장에서 이러한 성장을 만들어낸 배경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 LP판의 판매는 멈춘 적이 없다. 한 때 레코드판은 음악 시장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지만 시장에 풀려있던 수십억 장의 레코드판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리고 레코드판은 지하실이나 창고에 보관되어 언젠가 누군가에게 건네지거나 다시금 플레이될 날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 디지털이 거의 고사시킨 아날로그 레코드판의 부활에 일조한 것은 다름아닌 디지털이라는 점이다. 디지털을 통해 거래 효율성이 높아짐에 따라서 이베이와 같은 온라인 전자상거래 플랫폼에서 구매자와 판매자가 만나 레코드판을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셋째, 레코드판의 단점으로 여겨지던 것이 일부 소비자들에게 장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크고 무거운 레코드판 그리고 재생하려면 수많은 손길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이 레코드판을 경험하는 것이 불편함에서 '경험을 풍부하게 해 주는' 장치가 된 것이다.
<아날로그의 반격>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물과 아이디어들은 우리나라의 시장의 관점에서보면 약간의 간극을 느낄 수 있다. 레코드판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전체 음반시장의 약 5% 내외를 형성하고 있다. 숫자로 본다면 이는 약 50억 원에서 100억 원 수준의 아주 작은 시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트렌드의 측면에서는 고무적인 부분도 많다. 북미시장처럼 국내에서도 이제는 젊은 층에서 레코드판을 소비하는 문화가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열리는 <서울 레코드페어>에서도 레코드판을 즐기고 체험하고 또 구매하는 많은 비율이 과거 40, 50대에서 이제는 20대 30대 소비자들로 변화하고 있다.
레코드판으로 한정해서 본다면 아날로그의 반격이라는 제목은 너무 거창할지 모른다. 하지만 기술이 진보하고 더 편리한 음악 감상의 방법과 더불어 그 반대 수평선에는 여전히 손으로 잡히고 자신의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경험을 다시금 찾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많은 스트리밍 기반의 비즈니스 모델이 아직 엄청난 성공을 이루고 있지 못하는 것을 본다면 작지만 유의미한 시장으로서의 레코드 시장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레코드판이 소리를 더 잘 보존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짧은 글에서 다루기에는 기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부분과 배경이 많기에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색스가 말한 두 번째 아날로그 사물의 반격은 '종이'였다. 종이는 디지털 기술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은 최초의 아날로그 기술이다. 1970년대부터 '종이 없는 사무실'이라는 주제는 항상 많은 비즈니스들이 외치는 캐치프레이즈였다. 이처럼 종이는 디지털에 의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이런저런 형태로 수천 년 동안 경제적, 문화적, 과학적, 정신적 핵심의 근간을 이루는 데에 아주 중요한 요소로 존재해왔다. 인간이 종이와 맺은 관계 자체가 다른 아날로그 기술들보다도 오래되고 깊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아직도 종이를 쓰고 있다는 것은 아날로그의 기술이 특정 영역에서 아주 실용적인 수준에서는 디지털 기술보다 더 뛰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 보면, 종이가 가진 감성적, 경제적 가치도 아직은 경쟁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을 비롯하여 종이를 대체할 수 있는 많은 디지털 하드웨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종이의 수준의 그것을 구현한 제품은 없었다.
저자는 종이의 반격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제품으로 '몰스킨, Moleskine'을 소개했다. 몰스킨 노트는 인터넷 시대의 가장 중요한 종이 제품이자 브랜드로서 노트를 대체할 것 같았던 디지털 기술과 나란히 성장하고 있다.
몰스킨의 시작은 '관찰'이었다. 몰스킨의 창업자 세브레곤디, 파비오 로스치글리오네 그리고 모도 앤드 모도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움직이는 창의적 계층이 전 세계에서 새로이 부상하고 있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세브레곤디는 이러한 개인을 '현대의 유목민, Contemporary Nomad'라 명명하고 모도 앤드 모도는 이들을 위한 툴킷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노트 브랜드가 없었어요."
세브레곤디는 엄청나게 진부해져 버린 '창의성'이라는 키워드를 브랜드의 핵심가치로 두었다. 몰스킨은 창의성의 트리거와 같은 브랜드가 되었고, 곧 몰스킨 노트와 그 사용자들 주변에는 거의 부족적 동질감이 형성되었다. 파타고니아, 스타벅스와 같은 브랜드는 어떤 사람의 가치, 관심사, 꿈이 투영된다. 몰스킨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감성적 열망'을 브랜드의 큰 자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몰스킨이 성장해오면서 재미있는 부분은 철저히 아날로그적인 이 제품의 성공이 디지털 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보았던 어떤 분의 글처럼 아날로그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구식이 아니라 새로움과 추억'이다. 1980년대 몰스킨이 비즈니스를 시작했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성공을 이끌어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몰스킨을 비롯한 많은 종이 브랜드들은 "제 아이패드를 보세요! 사람들은 더 이상 노트를 쓰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을 매년 수많은 사람들에게 듣고 있지만, 종이의 종말은 오지 않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스킨을 통해 그들의 상상력을 표현하고 있다.
종이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에서도 우리나라의 작은 기업들에서도 아직 종이 명함을 사용한다. 명함은 500년간 이어져온 기술이자 문화가 되었다. 그리고 명함을 받은 사람은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더불어 새로운 기술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할수록 그것을 이해하고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새로이 익힌 내용들은 금세 상위 버전으로 업데이트되고 하드웨어 또한 지속적으로 바뀐다. 그리고 우리는 또 새로운 학습과정을 거친다. 종이는 이런 모든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2부 아날로그 아이디어의 반격의 첫 주제인 '인쇄물'은 저자의 재미있는 일화로 시작된다.
"왜 책인가요?"
뉴욕의 유명 마케팅 대행사 관계자와의 캐주얼한 미팅에서 그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굳이 책을 또 한 권 내는 이유에 대해 물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관계자가 말한 대안은 '브랜디드 콘텐츠, Branded Contents'였다. 사람들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브랜디드 콘텐츠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 대화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채널에서 가장 많이 소비하고 있는 콘텐츠들은 대부분 브랜디드 콘텐츠이지만, 책은 그것과의 별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쇄 미디어에서 일하는 것이 쇠락한 공업도시에서 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다. 인쇄 간행물들은 최근 십수 년간 저항할 수 없는 디지털 중력에 의해 계속 아래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물리적 공간도 차지하지 않고, 배송도 필요 없는 디지털 매체는 많은 소비자들의 일상에 다가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쇄물의 어떤 영역에서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고 있고 또 많은 성장을 이루어내고 있다.
인게이지먼트, 끈끈함, 발견성
디지털 출판의 성공담이 출판계의 전부가 아닌 이유는 인쇄물이 가진 위 세 가지 강점 덕분일 것이다.
최근 많은 분야에서 구독(subscription) 모델이 각광받고 있다. 음악 스트리밍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먹는 반찬이나 매일 입는 셔츠, 혹은 미술품이나 주류까지도 그렇다. 인쇄물 또한 예외는 아니다. 북미에서는 많은 독립 잡지 정기 구독 서비스가 등장하고 성공을 거두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인쇄물 구독 모델의 성공은 디지털 기술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출판 소프트웨어가 확장되면서 이제는 소규모 출판업자들도 꽤나 그럴듯한 잡지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에세도 P.O.D (Publishing On Demand) 서비스를 이용해 당장 책을 만들 수도 있다. 10년 전에는 개인이 스스로 출판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인쇄물과 디지털 콘텐츠는 독자들도 다르다. 인쇄 독자들은 두터운 친밀감과 충성도를 가지고 있다. 트래픽과 독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이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매체가 가지는 태생적인 환경의 다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오프라인 제품과 광고는 더 큰 수익률(규모를 말하지는 않는다.)과 단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쇄물이 주는 가치를 조금 더 말해보자. <이코노미스트>는 트래픽과 무료에 휩쓸리지 않은 좋은 사례이다. 온라인에서도 잡지를 발행하고 있지만, 디지털 구독자에게도 인쇄 잡지 구독자와 같은 구독료를 부과한다. <이코노미스트>가 실제로 성장한 이유는 '완독 가능성'에서 찾을 수 있다. 책 그리고 잡지는 그것을 다 읽고 표지를 덮었을 때, 실제로 '스마트 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구글과 네이버에서 기사를 검색하고 웹사이트에서 해당 기사를 읽을 때는 그것의 끝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이것은 웹과 디지털이 가진 장점이지만 말이다.
실제로 피치포크(Pitchfork), 폴리티코(Politico), 판도 데일리(Pando Daily)와 같은 전통적인 웹 매거진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인쇄물을 발간하는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레코드판처럼 인쇄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모노클>과 같이 오랫동안 장수하고 있는 잡지가 독자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인쇄물이 아닐까. 웹에서 접근하는 기사와 다르게 <모노클>은 잡지 한 권 한 권이 살아남아있다.
Print's Not Dead
'아직' 인쇄물은 죽지 않았다. 사람은 디지털보다 인쇄물과 더 많은 역사를 함께했고, 독자들에게 더 많은 관계와 가치 그리고 우연성을 선사해줄 수 있는 인쇄물은 아마 미래에도 실재하지 않을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오프라인의 경험들을 온라인에서 만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점을 방문하지 않고 알라딘이나 교보문고를 통해 책을 구매한다던지, 29cm나 지그재그와 같은 고도의 큐레이션과 브랜딩을 거친 쇼핑몰에서 많은 물건들을 구매한다. 10년도 전부터 '서점'이라는 단어는 '쇠퇴', '종말', '죽음이 다한' 등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등장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서점과 북카페 등을 비롯해 다양한 오프라인 매장들이 새로이 생겨나고 있다. 와비 파커는 물론 아마존 조차도 오프라인 매장 없이는 성공적인 리테일 비즈니스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매장들을 운영한다. 오프라인 매장은 전자상거래와 비교하여 과연 어떤 근본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을까?
(관련 콘텐츠: 온라인 거물 아마존·와비파커, 오프라인 진출하는 '진짜' 이유는?)
You've got offline. 매장은 웹사이트에서 소통할 수 없는 고객들을 확보해준다. 뉴욕 등에 새로 개점한 서점들 중에서는 아날로그라는 인식 상의 약점을 강점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아날로그의 바람직한 라이프스타일'을 고객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책을 아는 친절한 직원들과 그들의 휴먼 큐레이션을 통해 고객에게 웹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가치를 판매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적인 서점과 같은 차별화된 오프라인 경험을 선사하는 서점들이 생겨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핸드 셀링 문화와 알고리즘을 통한 큐레이션은 태생적으로 다르다. '무엇이 더 낫다'라는 평가에는 개인의 주관이 많이 반영되겠지만, 아직까지 휴먼 큐레이션은 유의미한 규모의 고객에게 많은 가치를 전달하고 있다. (나 또한 오프라인 서점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플라이북과 같은 알고리즘 기반의 큐레이션 서비스 또한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뭐 애플뮤직도 휴먼, 브랜드 큐레이션이 대세가 아닌가.)
리테일은 죽음을 앞두고 있고 온라인에서 거대한 성장을 목도하고 있다.
1위 업체는 계속 좋아질 것이다. 성공적인 대안이 있는 한,
리테일 체인들은 근본적으로 생존이 불가능한 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이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품을 온라인에서 파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전자상거래를 통해 이윤을 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마존 또한 20년 동안 책을 비롯한 수천, 수만의 제품을 온라인에서 판매해왔지만 최근에서야 영업 이익을 내고 있다. 같은 기간 동안 (내가 사랑하는) 아마존 AWS와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는 25%의 마진율을 마크했다. 신규 고객 유치부터 제품 판매, 배송까지 전자 상거래는 오프라인 매장보다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더 많다.
애플 제품을 가장 비싸게 팔고 있는 애플스토어에 사람들이 방문하고 제품을 구매하는 이유. 그리고 2015년 11월 시애틀에 첫 오프라인 서점을 개장한 사실들을 곱씹어볼 때, 온라인 리테일 비즈니스를 하는 많은 기업들이 이제 오프라인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온라인 리테일의 이점은 훨씬 더 깊고 디테일한 부분에 있다. 아마존이나 알리바바가 매출액에 비해 영업이익률이 낮다고 해도, 그들의 기업가치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은 바로 전자상거래이다. 아마존의 전자상거래는 단순히 제품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거래액만큼의 데이터베이스와 수천, 수억의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마진에 대해서는 어떨까? 오프라인이 일정 수준까지 더 많은 이윤 구조를 남길 수 있는 것은 '대개' 맞는 말이지만, 그 한계가 명확한 편이다. 메이시스가 아마존을 넘을 수 있을까? 결국 우리 가사는 디지털 세상에서는 플랫폼을 지배하는 디지털 기업이 독식하는 구조이다. 물론 사람들이 온라인 비즈니스를 하는 이유는 꼭 1위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오프라인에 비해 초기 비용이 적게 들고 상대적으로 가볍게 시작할 수 있기에 리스크가 덜하다. 더불어 조직의 구성원들에게 훨씬 더 확장성 있는 비전을 선사한다. 오프라인 매장을 사랑하지만, 오프라인 매장은 혼자가 아닌, 온라인과 결합되었을 때 그 진정한 가치를 드러낼 확률이 높다.
기술이 복잡해지고 발달하게 되면, 더 새롭거나 더 효과적인 기술들로 대체된다. 나와 같은 밀레니얼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이런 환경에서 살아왔다. 지금도 블록체인과 같은 테크놀로지는 향후 웹이나 현재 시스템들의 일정 부분, 혹은 더 파괴적으로 많은 부분을 대체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기술의 진화과정에서도 특이한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디트로이트에서는 죽은 테크놀로지들이 새 생명을 찾기 위해 위치를 재조정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스위스의 시계산업처럼. '시놀라, Shinola'는 남성을 위한 시계를 만드는 회사로서 2013년 남미도 중국도 아닌 디트로이트에 제품 생산 라인 공장을 짓고 매장을 열었다. 하반기에만 300만 달러 이상의 제품을 팔았고, 2014년에는 약 900만 달러의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시놀라의 시계는 저렴하지 않다. 하지만 IWC나 프레데릭 콘스탄틴처럼 초고가의 시계는 아니다. 시놀라 시계의 성공 이유는 '디트로이트산'이라는 것이었다. 브랜드 전체가 디트로이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몰락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걷던 그 디트로이트가 맞다. 다시, 남미나 동남아가 아니라 미국 장인의 정교한 솜씨와 독창성이라는 내러티브는 시놀라의 마케팅에서 집요하게 언급되는 요소이다.
다시 디지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파괴적 혁신'이나 '창조적 파괴'라는 키워드는 주로 디지털 혁신이나 테크놀로지의 내러티브에 녹아들어 있다.
기술을 기반으로 효율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저렴한 가격에
훨씬 더 편리하고 훨씬 더 시공간을 넘나들며 전달한다.
비즈니스맨에게 이 얼마나 낭만적인 말인가. 이 말에는 디지털 기술이 전통적인 아날로그 업종이 대적할 수 없는 방식의 동력을 가져온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창조적 파괴'라는 말은 1950년대의 경제학자인 슘페터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이후 코닥의 수십만 직원들의 와해는 창조적 파괴의 예시가 되어주었다. 1990년대 월드와이드 웹과 웹브라우저가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을 때 창조적 파괴는 꽃을 피웠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식 경제 철학이 세계에 퍼지면서 창조적 파괴는 확장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2017년에는 테크계 플랫폼을 지배하고 있는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그리고 우버와 같은 거인들이 자본주의와 데이터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디지털의 성장은 수십 년간 지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성장에 대한 반대급부로 고용이나 공동체의 이익에 대한 것들은 쉽게 간과할 문제는 아니다. 디트로이트는 이 반대급부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지역 중 하나이다.
과거부터 자동차 회사들은 자동화된 로봇으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왔다. 자연스럽게 디지털로 인한 세계화 또한 가장 최전선에서 일어난 도시가 디트로이트다. 닷컴 버블이나 신용위기와 같은 큰 경제 위기가 있을 때마다 상대적으로 더 큰 충격을 받은 도시로 소개되는 것 또한 디트로이트의 몫이었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자 수많은 사람들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날리며 채무자로 전락하게 되었고, 잇따른 소비 위축으로 자동차 산업 전체에서 기업들의 주가가 하락했다. 많은 기업들이 제품 생산을 중단했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디트로이트의 실업률은 한 때 약 30퍼센트까지 급상승했다.
시놀라는 이런 디트로이트를 브랜딩에 잘 활용했다. 본부와 공장은 디트로이트의 미드타운 인근에 위치하고 있고, 500명 이상의 인력들이 시놀라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시계 제작은 태생적으로 많은 의사결정을 요구하는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기에 생산 과정의 더 많은 부분에서 '사람'이 관여하게 되고 이런 경험은 그들이 회사의 일부라는 느낌을 준다. 북미뿐 아니라 세계 많은 국가에서 직업에 대한 가치 격차가 생겼다. 남들이 가치를 두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 말이다. 시놀라는 공정, 판매를 담당하는 구성원들에게 이 가치 격차를 없애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고 있다.
언젠가 구글에서 퇴사하여 에어비엔비에 다니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물었다. "구글에서 이직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의존 (human dependancy)를 줄이고자 하는 구글보다 사람과 함께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싶기 때문이었단다. 디지털은 '디폴트'를 만든다. 검색엔진에는 구글이 디폴트가 되고 우리나라 웹 브라우저에서의 첫 화면은 디폴트 값은 네이버의 몫이다. 승자독식의 디지털 비즈니스는 참 재미있다. 테크 업종이 세상을 지배할수록 일자리는 양극화된다. 기술을 이해하고 있는 극소수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저자는 디지털이 소프트웨어, 디자이너나 CEO와 같은 꼭대기 층에 위치한 아주 전문적인 직업과 폭스콘의 조립 기술자와 같은 아주 바닥에 위치한 보수도 낮고 기술 숙력도도 낮은 두 가지 유형의 일자리 창출에 능하다고 말한다.
소프트웨어와 디지털이 홈런으로 득점하는 게임이라면, 아날로그는 1루타와 2루타로 득점하는 게임이다. 확장성은 덜하지만, 노동자들을 곧 제품이나 서비스로 치환시키고 지역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비즈니스이다.
저자는 리스크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관점을 내놓았다. 아날로그와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온라인과 디지털에 비해 리스크가 적다는 것이다. 적어도 매출을 일으키고 지속 가능한 모델을 만드는 것에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초기에 드는 비용 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많은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디지털 비즈니스에 투자한다. 어떤 엔젤투자자들은 오프라인 비즈니스에 투자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창업자들 또한 (기반이) 아날로그 이거나 디지털인 비즈니스를 만들어간다. 결국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비즈니스의 관점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개개인의 역량, 추구하는 가치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에 적합한 비즈니스를 선택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디지털 업계는 누구보다도 아날로그를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매일 어딘가에 플러그인 된 상태로 살아간다. 내 경우에는 각기 다른 분야의 이해관계자와 엮인 페이스북부터 4개 정도의 지메일 계정을 매일 관리한다. 사내 협업 툴에도 내부용, 외부 커뮤니케이션용으로 나뉘어 30분에 한번씩은 체크해주어야 하는 업무 환경에 놓여있다.
'언플러깅'은 말 그대로 플러깅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주고 있다. 개발자들의 경우,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면 곧바로 코딩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많다. 프로젝트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단 킥오프가 된 순간 많은 몰입의 시간들을 쏟아야 한다. 자연스레 우리는 시야가 좁아져버린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도 늘 플러깅 상태로 있는다.
하루에 단 15분 동안만이라도 언플러깅 상태로 있을 수 있다면 어떨까? IDEO의 창업자인 톰 켈리는 그가 전파하고 있는 '창조적 자신감, Creative Confidence'을 이야기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창조적 자신감은 노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메일과 같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 환경에서 나오는 것이죠. 마치 매일 아침 샤워를 할 때처럼 말이에요. 한 가지 일에 집중을 할 때가 아니라 집중을 멈출 때 비로소 아이디어는 떠오른다.
스타트업 사무실 또한 아날로그적인 특성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실리콘밸리를 비롯해서 국내에도 유수의 스타트업 사무실이나 위워크(WeWork)와 같은 공유 오피스들에서는 위트 있고 어린아이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상징적인 테이블 축구부터 탁구대나 플레이스테이션은 스타트업 사무실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은행이나 로펌과 같은 전통적인 리테일러 사무실들이 최신 테크 들을 잔뜩 들여놓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최첨단 회사로 보이고 싶어 한다. 분위기 뿐 아니라 많은 테크 기업들이 의도적으로 오프라인 교류를 위한 장치들을 마련한다. 이를테면 서로 다른 부서의 사람들이 밍글 될 수 있게 네트워킹 이벤트를 마련한다던지,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라운지 등을 만들고 있다.
유틸리티는 어떨까? 대부분의 테크 기업들과 스타트업에서는 Slack과 구글 드라이브와 같은 협업, 생산성 툴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화이트보드도 볼 수 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은 항상 화이트보드나 종이에 개념도와 전략이 그려진다. 그리고 구성원 모두가 이 상황에서는 아날로그적인 방식이 가장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라고 느낀다. 지역과 분야를 불문하고, 아날로그는 아직도 업무의 어떤 중요한 부분에서 대체되기 힘든 존재다.
생각해보면 디지털노마드, 블록체인 그리고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다룬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일상에서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 변화나 트렌드를 포착하지 못하거나 자연스러운 일로 치부해버린다.
내가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된다는 것이다.
사고와 논리를 연결할 수 있는 힘은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눈을 더 즐겁게 해준다.
이런 키워드들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디지털의 성장, 그리고 아날로그의 반격
신자유주의부터 이어지는 디지털 시장의 플랫폼 독점, 양극화와 블록체인으로 대변되는 탈 중앙화
밀레니얼 세대가 느끼는 아날로그에 대한 인상과 기술의 진보에 따른 기존 기술의 리포지셔닝
디지털노마드, 리모트 근무의 확대와 아날로그 커뮤니케이션의 가치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을 뿐 모두가 알게 모르게 연결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과거부터 서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것들과 함께 살아왔다. 많은 경제학 이론들이 그랬고 사상이나 철학에도 비슷한 부분이 존재했다. 어쩌면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서로가 복수나 반격을 해야 할 존재들이 아니라 같이 했을 때 가장 큰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난주, 아웃스탠딩에서는 "아니요, 아날로그는 한 번도 반격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재미있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요약하자면 "아날로그는 반격한 적이 없고 로모그래피, 소비자는 아날로그 감성과 브랜드를 사는 거예요." 정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브랜드를 제외하면,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다룬 아날로그의 가치들은 꽤나 명확하다.
디지털이 아닌 물건이나 아이디어가 더 큰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생각은
실리콘밸리와 다른 스타트업 허브에서 확산시키는 파괴적 혁신을 우상시하는
기술 낙관주의의 내러티브에 반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기술 진화라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종이와 같은 것들이 실용적인 측면에서 디지털보다 우위를 점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고, 아날로그의 경험들은 그 어떤 브랜드로 채워지는 부분이 아니다. 아날로그의 '반격'이라는 표현은 조금 과할 수 있지만, 아날로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준다. 기사에서는 경제학 이야기도 등장하고 있지만, 사실 경제학의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본들 비합리적이고 통계나 데이터로 증명되지 못하는 야성적 충동과 같은 경향도 많지 않은가.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논리도 재미있었지만, 나 스스로가 여전히 인쇄물이라는 아날로그를 충분히 즐기고 있고, 또 여러 분야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디지털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 한번쯤 재미있는 논리와 상상력들을 일깨워줄 수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