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샌가부터 책을 읽는 것이 취미가 되었고 그래서 대한민국 평균치보다 훨씬 많이 읽는 일종의 다독가가 되었다. 하지만 다독가 더 나아가서 책을 읽는 행위가 고평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아웃풋(output)과 관련이 있는데, 유독 책만큼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즉 인풋(input)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좀 의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독가에 대해 대단하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이 하고 싶으나 실천하기 힘든 행위를 지속적으로 한 그 끈기와 자기 규율에 대한 찬사일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넘어 '다독가=지성인'과 같은 암묵적인 합의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이 나는 조금 불편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다독가나 제삼자가 봤을 때 서울대에 못 가서 서울대를 평가절하하는 것 같은 일종의 르상티망(Ressentiment: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느끼는 시기, 질투, 부러움이 뒤섞인 감정)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90년대 MBC 인생극장의 이휘재처럼 단호하게 "그래 결심했어"를 외쳤다. 1년 만이라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다독가가 되어보기로. 300권이 목표였다.
네이버 블로그 '캡선생의 언어'
2021년 한 해동안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하는데 할애했다. 출근 전에, 이동 중에, 자기 전에, 누구와 만나기 전에 카페에서 기다리며와 같이 가용 가능한 대부분의 시간에 독서를 했다. 그 결과는 네이버 블로그에 남긴 독후감을 기준으로 320권. 이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다독가' 타이틀을 얻은 것이다.(물론 타이틀은 내가 줬다)
나의 생각은 변하였는가? 큰 틀에서는 변하지 않았다.
320권을 읽고 다시 한번 책은 '얼마나'가 아닌 '왜', '무엇을', '어떻게'의 문제에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주기적으로 해보며 책을 읽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1. 나는 ‘왜’ 책을 읽는가?
2. 나의 ‘왜’에 걸맞은 ‘좋은 책’을 읽고 있는가?
3. ‘좋은 책’을 내 것으로 만드는 ‘좋은 독서’를 하고 있는가?
1번과 2번은 개인마다 답이 다 다를 수밖에 없는 '왜'와 '무엇을'의 문제니 패스하고, 그나마 다수에게 통용될 수 있는 '어떻게'와 관련된 3번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에릭 와이너의 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에릭 와이너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정보, 지식, 지혜를 아래와 같이 구분한다.
1)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
2)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
3) 지혜는 뒤얽힌 사실들을 풀어내어 이해하고, 결정적으로 그 사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
그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이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고 그래서 지식이 늘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지혜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지식이 늘면 오히려 덜 지혜로워질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에릭 와이너의 말에 따르면 '좋은 독서'는 결국 우리가 책을 통해 습득한 정보를 내나름의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지식으로 만들고, 그 지식을 실천 가능한 지혜로 만드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1번의 '왜'가 단순 즐거움이라면 이 말이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다)
독서에 대한 고평가에서 시작해서 좋은 독서 하는 법으로 끝을 맺는 이상한 글이 되어버렸다. 1년에 320권을 읽은 다독가=지성인이 아님을 증명하는 좋은 마무리인 것 같기도 해서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