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열었다. 거실 창문에서 들어온 햇살이 집안을 환하게 밝혔지만 공기는 차고 무거웠다. 하루 반나절만 비웠는데 실내에 낯선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주 멀리 떠났다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 없는 집에 사람대신 시간이 산다.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금세 나이를 먹고 낡아버린다.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희미하게 물냄새가 났다. 벽지에서 나는 냄새였다. 손 끝을 가져다 댔다. 한기와 습기가 느껴졌다. 창문을 열어두었던 거실 여기저기에 벽지가 운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에 본 밤안개가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방문을 닫아두었던 작은 방과 안방은 무사했다. 천장에 슨 곰팡이 때문에 항상 창문을 열어두었던 내 방은 안개의 습격을 받았다. 옷장문에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있었다. 옷은 멀쩡했지만 방 안의 벽지가 기포가 올라온 것처럼 울어버렸다. 우글거리는 거품이 올라오는 목욕탕의 온탕이 떠올랐다.
정리할 마음이 들지 않아서 그냥 향을 피워놓고 거실로 나왔다. 집안의 창문을 전부 다 열었다. 환기를 하고 볕에 말리면 그런대로 나아질 것 같았다. 어차피 낡고 오래된 집이라 흠이라고 볼 것도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창 밖으로 보이는 명학공원을 잠시 구경했다.
가을이 떠나고 빈자리를 겨울이 채웠다. 초겨울이다. 파란 하늘 대신 낮게 깔린 잿빛구름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눈구름인 줄 알았다. 작년 이맘때 눈이 많이 내렸다. 30년 만의 폭설이라 새벽까지 내리는 눈을 치웠다. 침대에 눕자마자 곧바로 다음날이 됐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곯아떨어졌다.
낡은 집에서 맞이하는 겨울은 낭만 하나 없는 고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다 같이 있을 때는 그런대로 견딜만했는데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있는 겨울은 외롭다기보다 괴로웠다. 그때는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계절이 변하듯이 사람 마음도 변한다.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먹먹하고 앞날이 그저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겨울이었는데 다 지나갔다. 여전히 현실은 걱정과 문제들로 가득하지만 지금은 웃는 여유도 생겼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결국 지나간다. 긴 여름장마 끝나면 가을이다. 예쁜 단풍을 좀 보나 싶었는데 어느새 겨울이다.
김장김치가 두 통쯤 비면 그때 봄이 온다. 계절은 세월처럼 흐른다. 날씨는 늘 좋았다 나빠지기를 반복한다. 좋은 날이나 나쁜 날은 없다. 그렇게 느끼는 마음가짐만 있을 뿐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다들 까먹고 산다. 짧았던 가을이 꼬리를 감추고 산너머로 떠났다. 주말에 겨울의 복귀를 알리는 비가 내렸다.
명학동의 오래된 빨간 벽돌 빌라들은 산등성이 사이로 내려온 밤안개를 맞았다. 이틀간 창문을 열어둔 채 집을 떠나 있었던 나는 안개의 흔적을 보고 글을 쓴다.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오늘은 제법 기온이 높다. 봄이나 가을 같다. 매서운 추위가 몰려오기 전에 날이 꼭 이렇게 풀린다.
방심하고 겉옷을 벗고 돌아다니면 감기에 걸린다. 일교차가 큰 날이다. 겨울은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을 닮은 계절이다. 좋았다가 나빠지는 사람의 기분과 날씨는 예측할 수 없다. 이러다 예고 없이 눈이나 비가 올 것 같다. 글을 쓰다 말고 일어나서 세탁기를 돌리고 책상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트를 다녀왔다.
대파를 한 단사서 다듬었다. 깐 마늘을 싸게 샀는데 다지는 건 내일 해야겠다. 기분에 따라 며칠 미룰 수도 있다. 홍차를 마시고 글을 마저 썼다. 텅 빈 공간을 온기와 향기로 채웠다. 허전한 마음을 둘 곳이 없어서 손에 가만히 붙잡고 있었다. 시간이 지우지 못한 생활감이 집안 곳곳에 남아있다.
손길이 떠난 자리를 손으로 쓸어보다 오래된 기억에 닿았다.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서있다 겨우 돌아섰다. 더운 체온이 남아있는 기억들 몇 개를 안고 돌아왔다. 추운 밤에 끌어안고 자야겠다. 창 밖은 겨울이다. 햇살은 따뜻한데 바람은 차다. 봄 같기도 하고 가을같기도 한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