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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09. 2023

흰머리

반환점을 돌다

 책을 보다 책상에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뿌리 부분은 희고 가운데는 갈색이고 끄트머리는 검은빛이었다. 곧 있으면 완전히 하얀색으로 물들었을 텐데 그전에 떨어져 나갔다. 새치의 종류는 두 가지다. 뿌리부터 하얗게 변하거나 머리카락 끝부터 하얗게 물들거나. 어느 쪽이든 결국 흰머리가 된다. 문득 거울을 바라보니 까만 머리 사이 형광등 빛을 받은 새치가 반짝거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새치가 많았다. 머리카락이 유난히 까만 편이라 새치가 눈에 띄게 도드라져 보였다. 성장기를 지나면서 새치는 더 많아졌다. 뒷머리와 정수리 부근에 몇 가닥씩 보이던 흰머리는 성인이 되면서 갈수록 빠르게 늘어났다.  


 20대 중반에는 머리 옆에도 조금씩 새치가 보였다. 30대를 넘어가면서 새치라는 말대신 흰머리라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 늘어버렸다. 어렸을 때는 새치를 보이는 족족 뽑아버렸지만 지금은 그대로 놔두고 있다. 나처럼 새치가 많았던 고교 동창은 20대 중반부터 열심히 염색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염색을 해보라는 말을 종종 듣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한 번 하면 계속해야 한다. 옅은 눈썹을 짙어 보이게 그리다 그만둔 이유와 비슷하다. 그대로 두면 그냥 내 일부지만 건드리면 단점이 된다. 내 흰머리가 늘어난다고 불이익을 얻는 경우는 없다. 주변 사람들이 피해볼 일 역시 없다. 거울로 보는 내 모습에 제일 익숙한 사람은 나다. 내가 괜찮은데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일일이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어차피 흰머리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30대 중반을 넘기면서 눈에 띄게 증식하고 있다. 이전에는 새치가 많은 체질이었겠지만 지금은 노화의 과정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염색을 해도 빈도가 늘어나는 속도를 늦출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중이다. 무심한 마음을 갖는 것과 별개로 점점 하얀 경계선이 넓어지고 있다. 검푸른 파도 사이로 비치는 은빛 물결처럼 흰머리는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거린다. 거울을 보다 비스듬히 얼굴을 돌리면 까만 머릿속에 은빛 실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유성의 하얗고 긴 꼬리가 검은 밤하늘에 궤적을 남긴 것 같다.


 특별한 이유 없이 새치가 많이 나는 사람은 유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아버지는 30대 후반에 이미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렸다. 나 역시 그런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 뉴스보도에 따르면 유전인자를 가진 사람은 평범한 사람에 비해 거의 20배 빠른 속도로 흰머리가 늘어난다고 한다. 20배라는 수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비교대상인 일반인과의 차이를 나타낸 숫자만 보면 꼭 슈퍼히어로의 능력처럼 보인다. 머리가 빨리 새는 능력도 히어로가 될 수 있을까? 현실에서 능력을 쓸 일이 전혀 없을 것 같다. 한 번 하얗게 변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것 같다.


 확실히 흰머리가 나는 속도는 남들에 비해 월등하게 빠르다. 거울을 보면 적어도 머리카락의 30% 이상은 이미 은빛으로 물들었다. 작년부터는 앞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했다. 중학생 시절 KBS2에서 방영했던 매직키드 마수리에서 보던 헤어스타일이 생각난다. 머리카락 일부만 염색해서 브리지를 넣었던 그 시절 감성을 내 유전자가 재현해 냈다. 서쪽으로 말을 몰고 달렸던 몽골의 용맹한 기병을 연상케 하는 흰머리의 진격은 매섭다. 함락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라시아의 도시처럼 검은빛은 점점 퇴색하는 중이다. 인간의 삶을 작은 역사라고 생각해 보면 노화는 막을 수 없는 쇠락과 같다. 모든 제국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는다. 젊음이 지나간 자리에 하얀 흔적이 남는 것과 같다.  


 막을 수 없는 노화를 늦추기 위해 사람들은 애를 쓴다. 죽음에 저항하는 생명의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가끔씩 흰머리를 보면서 소멸이라는 개념을 생각한다. 태어난 이상 모든 생명은 죽는다. 별과 우주도 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영원은 어느 순간부터 사랑을 표현하는 데만 쓰는 미사여구가 됐다. 인간이 느끼기에 무한한 시간에도 끝이 있다. 그 속에서 찰나와 같은 순간을 살다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필연이다. 언젠가 도착할 종착역이면서 동시에 목적지다. 생명은 죽기 위해 태어난다. 끝이 있기 때문에 삶이라는 과정은 의미가 있다. 결과는 어디까지나 가치를 판단하는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인생은 죽음이라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언젠가는 내 머리 위에 하얀 서리가 빈틈없이 내려앉을 것이다.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고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관리와 시술을 통해서 가꿀 수 있는 것은 외모뿐이다. 꾸준한 운동과 건강한 식단을 통해서 체력의 노화를 늦출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과 마음도 늙는다. 뇌도 나이가 든다. 바람은 묶어 둘 수 없고 물이 증발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건강은 내 몫이지만 수명은 내 역량을 벗어난 영역이다. 올 때가 있다면 갈 때도 있다. 20대 때만 해도 노년기의 삶이나 죽음을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늘어나는 흰머리를 보면서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리고 동시에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감사하게 된다.


 죽음과 노화를 피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가능하면 삶을 즐겨야 한다. 불안해하거나 걱정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낼 이유는 없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므로 작은 것들에서 행복을 찾는 연습을 한다. 먼 훗날의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즉각적인 행복은 늘 작은 만족에서 비롯된다. 좋은 날씨에 기뻐하고 평소보다 맛있게 느껴지는 밥에 감사함을 갖는다. 너무 사소해서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인생의 대부분은 그런 별것 아닌 순간들이 차지한다. 그 작은 순간들을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다면 삶은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행복이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 행복과 진리는 늘 일상 속에 숨어있다. 눈을 감고 살면 가르침을 찾아 평생을 헤매지만 눈을 뜨면 매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는 주인공 윌리 웡카가 자신의 머리에서 새치  가닥을 발견하는 장면이 나온다. 노화는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변곡점이다. 노화의 척도 중에서도 흰머리가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같다. 체력저하나 늘어난 주름은 관리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작용하지만 새치는 다르다.  무리 속의 새하얀 학처럼 검은 머리의 물결을 거스르는 흰머리의 존재감은 강렬하다. 그동안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생각해 보는 계기는  올의 흰머리에서 온다. 그런 점에서 흰머리를 삶의 반환점이라고 불러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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